[최재영목사 방북기41]북한의 교회를 찾아가다①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번 주부터 총 15회 정도 북한의 기독교 교회를 탐방한 <북한교회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한국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북한교회에 대해 새로운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통일뉴스 동시 게재

 

'기독교'와 '미국'에 대한 두 할머니의 깊은 상처

나는 평양방문 일정중에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산책길에 나선다.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에 일어나 대동강변을 향해 산책에 나섰다. 마침 동이 터가는 무렵의 강가에는 70대 후반의 할머니 두 분이 뚝방에 나란히 걸터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다가갔다. 할머니들에게 간단한 안부 인사를 드린후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해방전 평양에 있던 교회 이야기를 꺼내며 어릴적에 교회에 다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지팡이를 든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다녀본 적이 없다는 의미를 던져주는 듯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설레설레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같이 산책하던 일행에 뒤처지지 않으려 급히 인사를 하고 할머니와 헤어졌다.

그리고는 이튿날도 산책을 하다보니 어제 그 자리에 그 할머니들이 다시 앉아 계셨다. 나는 일행의 대열에서 잠시 홀로 이탈해 그 할머니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속내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는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6.25전쟁 당시 미군폭격에 의해 형제 3명과 어머니를 동시에 잃고 자신과 아버지만 구사일생으로 남았다고 전해 주었다. 전쟁통에 흔히 그럴 수 있는 일이겠거니 하며 나머지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사연은 그게 아니었다.

피난민 대열속에 섞여가던 할머니의 가족들은 미군폭격을 피하려 이리저리 몸을 숨기던 중 가장 안전하게 생각한 교회당으로 피신을 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평안도 정주에서 교회를 다녔던 아버지는 우박처럼 쏟아붓는 포탄공격으로 절박한 상황이 되자 식구들에게 "미국은 기독교 나라니까 교회당으로 피신하면 무사할 수 있다. 빨리 따라 오너라"하며 온 식구를 데리고 근처에 있던 교회당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러나 잔인한 미군 조종사는 오히려 그 교회당 건물에 더 집중적으로 폭탄을 퍼부어 안타깝게도 나머지 식구들이 모두 몰살을 당했다고 했다.

그후부터 그 할머니에겐 '기독교', '교회', '예수', '예배당', '미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분노와 증오가 치밀며 한 평생을 살아왔다고 눈물을 글썽이셨다. 난 그 순간 갑자기 방망이로 한 대 얻어 맞은듯했다. 더 이상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필요없었다.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민망함 그리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이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당시 방북단 일행중에 교회를 안다니는 분들도 더러 있기에 혹여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생길까봐 나는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지금까지 혼자 간직하고 있었다.

대동강변 아침 산책중에 만난 할머니가 온 가족이 교회당에 피신했다가 미군폭격에 의 해 몰살당했다며 필자에게 증언하는 모습. ⓒ최재영

대동강변 아침 산책중에 만난 할머니가 온 가족이 교회당에 피신했다가 미군폭격에 의 해 몰살당했다며 필자에게 증언하는 모습. ⓒ최재영

함께 동행한 이웃 할머니가 해방전의 교회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는 모습. ⓒ최재영

함께 동행한 이웃 할머니가 해방전의 교회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는 모습. ⓒ최재영

그뿐 아니었다. 내가 황해도 신천군을 방문할 때의 일이었다. 양팔이 완전히 잘려나간 '복수하리라'의 어머니인 리옥희 할머니를 만났을 때 내가 받은 충격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전쟁 이후 성장한 후 결혼해서 삼남매를 낳았는데 첫째 아이의 이름을 '복수' 둘째는 '하', 셋째는 '리라'로 지었다. 사건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생했다. 황해도를 진격한 미군은 신천군 일대를 좌익과 우익이 서로 잔인한 살육전을 벌이도록 공작을 벌여 전체 군민들을 죽음의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마을마다 총부리를 들고 들어가 좌익들을 색출하던 때였다.

당시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는 음식을 구하러 밖으로 몰래 나왔다가 미군에게 발각되어 달아나던 중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은신처로 들어가려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지척에서 쫓아오던 미군의 무차별 난사로 두 팔이 잘려나갔다. 바다 건너 기독교 나라에서 온 백인에 대한 소녀의 선입견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엔 한평생 증오와 저주만이 대신 하게 됐다. 미국에 대한 그녀의 복수심과 증오심이 얼마나 극에 달했으면 자식들의 이름을 '복수하리라'로 지었겠는가? 평생을 안팎으로 상처입은 채 불구자로 살아오며 겪은 그녀의 깊은 한숨과 설움을 그 누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굳이 두 할머니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이처럼 이북의 인민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북의 인민들에게 행했던 일은 60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북의 인민들에게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으며 그 어떤 회복의 기미가 좀처럼 없어 보였다. 그들의 반미감정은 미국이 믿고 있는 종교라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에까지 거부감과 증오로 변환되었다.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북한 정부는 인민들에게 반미와 항미를 일관성있게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과 국가가 정치적 목적으로 주도하는 습관적 반미운동이 아니었다. 인민들 속에 깊이 뿌리내린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상처와 원한을 국가에서 어느 정도 대변해주는 것에 불과한 것임을 나는 현장에서 알게 되었다.

황해도 신천군에 진격한 미군의 총격으로 양팔이 잘려나간 리옥희 할머니의 최근 활동 모습(3남매의 이름을 '복수.하.리라'로 지었다). ⓒ최재영

황해도 신천군에 진격한 미군의 총격으로 양팔이 잘려나간 리옥희 할머니의 최근 활동 모습(3남매의 이름을 '복수.하.리라'로 지었다). ⓒ최재영

신천학살사건 당시 읍내는 물론 시골까지 찾아가 좌익세력과 부역자 가족을 색출하는 미군의 모습(미국립문서보관소). ⓒ최재영

신천학살사건 당시 읍내는 물론 시골까지 찾아가 좌익세력과 부역자 가족을 색출하는 미군의 모습(미국립문서보관소). ⓒ최재영

신천학살박물관에는 학살 피해자 통계가 걸려 있다. ⓒ최재영

신천학살박물관에는 학살 피해자 통계가 걸려 있다. ⓒ최재영

학살을 주도한 미군 조직체계와 협력단체조직표에는 미군 군종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최재영

학살을 주도한 미군 조직체계와 협력단체조직표에는 미군 군종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최재영

북한교회를 이해하는 첫 걸음은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

북한을 내재적 접근방법으로 바라보지 않더라도 저 상처받은 두 여인들이야말로 내게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으로 다가왔다. 유대민족과 사마리아민족은 원래 한 혈통이었으나 제국의 침략전쟁의 비극적 결과로 두 민족은 서로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후 아주 오랜 세월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상종하지 않고 왕래조차 없이 서로를 비난하며 높은 장벽을 두고 각자 살아갔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 모두가 회피하고 무시하던 그 장벽을 허물고자 큰 결단과 각오로 직접 사마리아를 찾아가 우물가의 한 여인을 만나셨으며 그녀가 풀지 못하던 모든 정치적, 종교적인 근본문제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셨다.

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도 그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성도 없는 북한선교의 허영에 들떠 있지 말고 한국교회는 이제부터라도 예수께서 성경에서 모범을 보이신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의 기초를 놓는 과업부터 하나씩 차근차근히 시작해야 한다.

북한은 일본과 미국 같은 제국의 압제와 위협 속에서도 해방이후 지금까지 독립된 주권 국가를 지키기 위해 피땀 흘려왔다.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미국이 신봉하는 기독교를 철저히 경계하고 배척해야만 하는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쓰라린 역사의 경험이 그들에게는 현재 진행형으로 생생하다.

더구나 6.25전쟁으로 인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운 북녘의 교회당은 모두 훼파되고 온전하게 남은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미군의 폭격과 무차별적인 만행으로 북한 전역에 분포되었던 7,491개소의 종교시설물들이 모두 파괴되어 사라져버렸다. 이중에 불교사찰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기독교관련 기관들과 교회와 성당들이었다.

벽돌 하나 제대로 남아 있지 않는 잿더미 속에서 북한교회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암흑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적어도 1953년부터 1972년까지는 그랬다. 이 10년의 기간은 국가적으로 전후 복구와 재정비를 위한 충전의 시기였다.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1972년도부터 조금씩 그 경계심과 불신의 마음을 열고 북한은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들을 세우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도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연이어 설립했다. 또한 목회자를 배출하는 평양신학원까지 설립하는 진전을 보였다.

이런 일련의 변화와 노력들을 우리는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이해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런 내용을 무시하거나 알지 못한 채 북한은 종교의 자유가 없으며 종교를 핍박하는 박해국가라고 매도한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세워진 모델교회들도 모두 가짜라며 무작정 질타하며 비판해왔다.

1901년 당시 평양 기독교의 중심이며 모체였던 장대현교회 모습. 이 교회로부터 산정 현교회등이 분리 독립됐다. ⓒ최재영

1901년 당시 평양 기독교의 중심이며 모체였던 장대현교회 모습. 이 교회로부터 산정 현교회등이 분리 독립됐다. ⓒ최재영

1938년 당시 평양 산정현교회 모습. ⓒ최재영

1938년 당시 평양 산정현교회 모습. ⓒ최재영

1949년 당시 평양 남산현교회 모습. ⓒ최재영

1949년 당시 평양 남산현교회 모습. ⓒ최재영

1953년 휴전직후 철저하게 파괴되어 폐허가 된 평양시내 모습. ⓒ최재영

1953년 휴전직후 철저하게 파괴되어 폐허가 된 평양시내 모습. ⓒ최재영

북한의 인민들은 과거 60년이 넘는 동안 사회주의와 주체사상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종교문화나 사상을 접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보수세력과 반통일세력들은 한국교회 시스템과 미국교회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고 무조건 폄하하고 무시하고 있다. 북한 기독교는 자신들이 피땀 흘려 지켜온 민족정신의 바탕위에 세운 자주정신과 주체문화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교회들을 세우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

북한은 분단이후 지금까지 주체문화가 자연스레 토착화 되었으며 1972년 이후부터 서서히 뿌리내리기 시작한 북한 기독교 공동체들은 이런 주체문화와 공존하며 민족종교화의 과정에 있었다. 기독교라는 거대하고도 세계적인 종교를 자신들만의 민족종교로 정착시키는 유일한 국가는 지구상에 북한밖에 없는 것 같이 보인다. 필자가 탐방한 북한교회들은 이런 토착화의 과정을 착실히 진행시키고 있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철저히 미국식 기독교를 따르는 한국교회는 자신들이 믿는 방식과 다르다고 해서 북한교회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대남선전용이니, 대외과시용이니 홍보용이니 하는 근거없이 다양한 비판만을 일삼는다. 종교성과 신앙색채가 서로 다를 뿐 교회로서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남한식 기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동안 북한교회와의 진지한 대화와 교류를 무시하고 단지 식량과 물품지원을 받는 구호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만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이런 행위들은 무지의 소치이며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인의 모습도 아니다. 남한교회가 솔선수범해서 교회내에 통일문화를 이끌어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북한을 가장 적대시하는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교회강단을 반공강연장으로 만드는 반통일적인 독소세력이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최초에 건립된 평양봉수교회가 재증축을 위해 철거되는 모습. ⓒ최재영

최초에 건립된 평양봉수교회가 재증축을 위해 철거되는 모습. ⓒ최재영

신축된 봉수교회가 완공을 위해 그 윤곽을 드러낸 모습. ⓒ최재영

신축된 봉수교회가 완공을 위해 그 윤곽을 드러낸 모습. ⓒ최재영

칠골교회가 재건축을 위해 공사하는 현장을 방문한 필자. ⓒ최재영

칠골교회가 재건축을 위해 공사하는 현장을 방문한 필자. ⓒ최재영

 

북한의 포괄적 기독교 교회

북한에도 남한이나 서방세계처럼 다양한 기독교 교파와 교단이 있다. 나는 이를 두고 포괄적 기독교교회(범기독교 교단)라고 명칭한다. 이번 방북기 시리즈에서는 개신교의 각 교회들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러시아정교회까지 포함할 것이며 심지어 남한교회에서 이단교회로 분류된 통일교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또한 현재 북한 영토내에 설립되거나 운영중인 교회들을 직접 탐방하여 교류한 사례들을 영상자료와 함께 다루고자 한다. 또한 그동안 남과 북이 서로 합의하여 북한 영토내에 설립했던 민간교회들은 물론 현재 설립을 추진중인 교회들까지도 취급하고자 한다.

조그련 본부 입구를 찾은 필자. ⓒ최재영

조그련 본부 입구를 찾은 필자. ⓒ최재영

북한 유일의 신학교인 평양신학원 전경. ⓒ최재영

북한 유일의 신학교인 평양신학원 전경. ⓒ최재영

평양신학원 입구에선 필자. ⓒ최재영

평양신학원 입구에선 필자. ⓒ최재영

 

종교자유의 범위와 지하교회에 대한 이해

북한은 분명히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어 있으며 종교를 억압하거나 핍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종교를 적극 권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미국과 첨예하게 대결하다보니 자신들이 지켜온 자주성과 국가의 생존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유동성있게 종교를 제한할 뿐이다. 따라서 미국과 일부 서방세계가 북한의 종교 실태를 왜곡하여 인권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범위까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며 어떤 방식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되며 종교자유의 한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자 한다. 미국과 남한측이 근거로 삼는 왜곡된 정보와 자료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역사적 배경과 북한에서 직접 체험한 팩트 위주로 접근할 것이다. 또한 북한 헌법과 경제특구법 조항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에 대한 부분을 북측 당국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이 조항들이 실제로 북한의 인민들과 외국인들에게는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에 대해 심도있게 다루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첨예한 문제가 북한의 지하교회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교회와 지하교회를 혼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가정교회(처소교회)'는 노동당과 정부가 인정하고 공인하는 합법적 교회인 반면 '지하교회'는 미국과 한국과 중국 등에서 훈련받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북한 영토내에 비합법적으로 입국하여 북한 당국의 승인절차 없이 음성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거나 조직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경우는 북한당국이 체제 전복세력과 반통일세력으로 규정하여 철저하게 단속한다.

또한 고난의 행군시절 해외로 탈북 후 기반을 잡은 탈북자가 그곳에서 기독교인이 된후 다시 북한으로 재입국해 자생적으로 세운 지하교회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전문가들이 있으나 북한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이처럼 음성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거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수평사회가 아닌 수직적 구조의 북한의 특성상 탈북자가 재입국하여 북한 영토내에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에 대한 북한 당국자의 입장도 밝힐 예정이다.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메시지를 전하는 필자의 모습. ⓒ최재영

봉수교회 주일예배에 메시지를 전하는 필자의 모습. ⓒ최재영

봉수교회 주일에배에서 축도를 하는 필자. ⓒ최재영

봉수교회 주일에배에서 축도를 하는 필자. ⓒ최재영

 

북한교회의 유형과 분류, 북한에는 어떤 교회가 있나?

1980대 이후 북한 영토에 설립되었던 기독교를 유형별로 크게 분류하면 민간교회와 공식교회로 나눠진다. '민간교회'란 남과 북이 상호 협의하여 북측 영토에 설립한 남한교회들을 일컫는다. 이런 민간교회의 경우는 주로 '직장교회'가 대부분이다. 지금은 중단됐지만 함경도 신포의 케도(KEDO) 경수로 공사현장 생활관 부지내에 건축된 '신포교회'와 '금호성당'을 비롯해 금강산관광 시기에 금강산빌리지에 세워진 '금강산교회'가 있고, 개성공단내에 건축된 '개성신원교회'가 있다. 또한 평양과기대 게스트하우스내에 '평양과기대 채플'에서는 지금도 매주 오전 9시에 주일예배가 드려진다. 이와는 별도의 민간교회로는 대동강변에 건축된 '평양 제1교회'가 있는데 이는 다용도교회로서 원래의 온실건물 용도와 함께 2층에 별도로 작은 기도처소 형식의 예배당이 마련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공식교회(공인교회)'를 살펴보면 현재 예배나 미사가 드려지는 사역교회로는 개신교의 평양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있으며 천주교의 '장충성당'과 러시아정교회의 '정백성당'에 매주 미사가 드려지고 있다. 또한 '사적지교회'로는 황해도 '은률읍교회'와 량강도 포평사적지내에 있는 '포평교회'가 있다. 또한 형제산구역에 있는 영화셋트 촬영장소로 사용되는 '형제산 교회당'이 있으며 통일교가 보통강호텔앞에서 운영하는 '국제평화센터'가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교회건물이 추진되고 있거나 추진중에 중단된 교회들을 살펴보면 미국의 프랭클린 그레이엄목사(빌리그래엄 목사 아들)가 추진중인 '평양국제 외국인교회'가 설립 준비중이며. 미국의 IT기업 '노바'의 조명호사장이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하던 중 갑자기 타계하는 바람에 현재 중단된 상태에 있는 '평양 국제하베스트교회'가 있다. 또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설립한 '평양 조용기목사심장병원' 건물에 30평 규모의 교회당이 허가를 받았으며 이 병원건물은 5.24대북조치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현재 공사가 중단된 상태에 있다.

또한 개신교는 전국적으로 500여개의 가정교회(처소교회)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평양특별시, 남포시, 개성시,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황해남북도는 물론이고 강원도, 량강도, 자강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천주교측도 20곳의 가정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북한은 정형화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교회가 더러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부분도 심도있게 다룰 것이다.

북한의 기독교 기관들

북한의 기독교관련 기관은 북한 유일의 신학교인 '평양신학원'을 비롯해 북한교회를 대표하는 '조그련(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있다. 조그련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북한 기독교를 총괄하여 이끄는 기관이며 조그련의 수장은 강명철 위원장이다. 강위원장이 취임 직후 가장 먼저 필자와 대담하며 그가 북한의 기독교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다.

북한교회를 상징하는 쌍두마차인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는 북한 노동당과 정부, 조그련이 인정하는 국가 브랜드교회이다. 봉수교회가 위치한 거대한 기독교 타운내 중심에는 가장 한복판에 봉수교회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교회마당 좌측에 조그련 본부가 위치해 있다. 이어서 교회 우측 담벼락 쪽문을 통과하면 넓은 정원이 펼쳐지며 그곳을 통과하면 평양신학원 캠퍼스가 나온다. 필자는 이 두 기관에 대한 상황과 교류내용도 밝힐 것이다.

또한 칠골교회 역시 거대한 타운내에 조성되어 있으며 타운에는 김일성주석의 항일투쟁 자료는 물론이고 외가와 친척들, 교회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이 전시된 '칠골혁명사적관'이 들어서 있으며 그 뒤쪽엔 초가집 형태로 지어진 김일성주석의 모친 '강반석여사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생가 옆엔 김일성 주석의 '부친 김형직선생과 모친 강반석여사의 동상'등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타운의 맨 뒤쪽 기슭엔 해방전엔 기독교 미션스쿨로 운영되던 '창덕소학교' 캠퍼스가 나오는데 현재도 이 학교는 엘리트 학생들이 재학중이다. 이 학교는 김일성주석이 실제로 다녔던 초등학교였으며 학교 설립자는 김주석의 외조부 강돈욱장로였다. 이곳엔 김주석이 공부했던 교실과 책상 등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캠퍼스 좌측 기슭엔 김주석의 친 외조부 형제(강돈욱, 강성욱)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이번 방북기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이런 모든 부분을 자세히 다룰 것이다.

최재영

댓글 남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