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Kang 방북기55]나의 스승 홍동근 목사님 묘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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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CJ Kang께서 2014년 9월 3~11일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NK투데이는 필자와 협의 아래 방북기를 연재합니다.
필자의 승인 아래 원문의 표현 가운데 일부를 한국 실정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외부 기고는 본사 입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내가 이번에 북부조국을 방문하여 처음 안내원과 일정을 의논하면서 특별히 방문하고싶은 곳으로 두 곳을 요청하였다. 하나는 협동농장이었고 또 하나는 나의 스승 홍동근 목사님의 묘소를 찾는 것이었다. 이미 만경대협동농장과 세포등판을 답사하였으니 협동농장과 농촌을 찾는 일은 이미 이뤘고 오늘은 추석을 맞아 홍 목사님의 묘소를 찾게 된 날이다.

추석날 오전의 애국열사릉. 이미 이곳을 찾은 많은 인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CJ Kang

추석날 오전의 애국열사릉. 이미 이곳을 찾은 많은 인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CJ Kang

내가 25년 전에 북부조국을 방문하였을 때 혁명열사릉을 방문했었다. 각 묘소마다 거기 묻힌 항일혁명 빨치산 열사들의 생전의 모습을 반신조각상으로 모신 것을 보면서 북부조국이 나라를 찾기 위해 생명을 바쳐 투쟁한 혁명가들을 그렇게 귀하게 모신 것을 보고 감탄했었다. 애국열사릉 또한 주변 환경이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아름답게 공원처럼 단장된 곳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큼직한 묘비와 사진으로 생전의 고인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다.

ⓒCJ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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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근 목사님은 이곳 애국열사릉에 묻히셨다. 애국열사릉은 그야말로 북부조국에 기여한 애국자들이 묻힌 곳으로 이미 잘 알려진 곳이라 내가 따로 세세하게 애국열사릉에 대하여 쓰지 않지만 애국열사릉의 안내원에게 질문한 것 가운데 한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내가 이곳에 묻힌 대부분의 애국자들은 북녘 출신이지요하고 안내원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대답은 뜻밖에도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해방 당시 북부조국엔 대학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대학이 있는 서울을 비롯한 남녘출신이었고, 그런 지식인 애국자들이 북부조국으로 찾아와 새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묻혔기에 애국열사릉에 묻힌 애국자들은 남녘출신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이곳을 찾는 저 수많은 인민들 또한 남녘이 그 조상들의 고향인 사람들이 많으리라.

ⓒCJ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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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근 목사님의 묘소는 애국열사릉 가장 높은 곳의 오른편에 위치해 있었다. 아, 이렇게 조경이 잘 되어있고, 환하고 양지바른 곳에 스승님께서 묻히셨구나. 이곳 북부조국은 스승님의 고향이 있는 곳인데 통일운동으로 거기서 애국자가 되어 애국열사릉에 묻히셨구나. 내가 평생 동안 존경해온 스승께 꽃을 바치고 참배를 하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CJ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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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근 목사님과 나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하와이에서 생강농장을 하던 시절에 그곳의 소아과 의사 박훈 선생님과의 옛 인연으로 홍동근 목사님이 작은 교회로 방문한 것이었다. 홍 목사님은 평안북도 피현이 고향이다.

그가 80년대 초반에 북의 어머니를 방문하여 만나뵌 지 석 달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북부조국 방문을 미루고 그때를 놓쳤더라면 영영 생전의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후회하였을 것이다.

홍 목사님은 그렇게 만나뵌 모친과 가족들과의 상봉과 옛 고향의 이야기와 통일을 주제로 나를 포함한 하와이 섬의 동포들에게 참 귀한 설교를 하셨다.

당시 어용언론에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고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준 부분에 대하여 ‘도산이 도산을 부른다’라며 매도하고 있는 것을 내가 거론한 적이 있는데 홍 목사님은 바로 그 도시산업선교회를 자신과 다른 목사님이 함께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시절 박정희 정권 당시에 일본에서 초대를 받고는 강연을 하고 남부조국으로 돌아가려는데 입국을 가로막아서 귀국할 수가 없게 되어 결국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독재정권을 비판한다해서 외국에 나갔던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자국민의 입국을 금지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시절을 겪으신 것이다.

홍 목사님은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 ‘선한사마리아인 교회’의 목사로 계시면서 통일운동을 펼쳐나갈 터전을 마련하였다. 80년대 초, 남북관계가 얼음같던 그 시절에 ‘북과 해외기독인과의 대화’로 비엔나, 헬싱키 등에서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게 되었는데 해외의 기독교 인사들과 북부조국이 서로 터놓고 대화함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나갔다.

전쟁 당시의 폭격으로 북녘의 교회당 또한 모두 무너져버렸는데, 교회당을 다시 짓는 것을 생각조차 않던 북부조국이 그런 대화를 통하여 평양에서 봉수교회, 칠골교회가 세워지는데 큰 기여를 하셨다. 홍 목사님 내외분은 이후에 해외의 이산가족들이 고향의 친지들을 찾아 방문하는 사업에도 힘써 일하셨는데 그렇게 해외동포들과 북이 서로 교류하게 된 것이 이후의 남과 북의 정상회담과 6.15 선언을 가져오는 귀한 디딤돌이 되었다.

홍동근 목사님은 90년부터 2001년 평양에서 갑자기 돌아가실 때까지 김일성대학에서 기독교와 종교학 강좌를 하셨다. 북부조국이 서방세계와 서로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홍 목사님의 뜻을 북부조국에서 선뜻 받아들여서 그렇게 강좌를 이어가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 상대방이 바로 홍동근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홍동근 목사님은 다른 여타 개신교 목사님과는 크게 다른 분이며 참 선지자로 사셨던 분임을 북부조국에서도 잘 아셨기 때문이리라.

홍동근 스승님의 신학은 신을 위한 신학이 아니다. 바로 민중을 위한 신학이고 민중의 해방을 위한 신학이다.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해방을 이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듯이 신은 민중의 해방을 원한다. 우리민족도 진정으로 해방을 이뤄야 한다. 창과 칼을 쳐서 낫과 보습을 만드는 세상, 지구상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넘쳐흐르는 세상, 온 세상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바로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세상이다.

스승님의 이런 신학을 북부조국에서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런 신학이라면 주체사상과도 서로 상통한다.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서로가 반대될 이유가 없다. 그것이 성경을 관통한 참 사상이고 진리라면 북부조국이 그런 기독교를 배척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홍동근 목사님의 묘소를 찾았을 때, 누군가 거기 일찌감치 다녀갔는지 꽃다발 하나가 먼저 놓여 있었다. 북부조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친지가 왔던 것일까 아니면 이곳에서 강좌를 하는 동안 홍 목사님에게서 배운 다른 제자가 찾았던 것일까.

홍 목사님 묘소를 떠나기 전에 안내원과 함께. ⓒCJ Kang

홍 목사님 묘소를 떠나기 전에 안내원과 함께. ⓒCJ Kang

내 평생의 가장 귀한 스승 홍동근 목사님이시여, 멀리서 선생님께서 지극히 사랑해주셨던 제자가 찾아왔으니 위로 받으소서. 선생님께서 평생을 소원하던 통일까지는 아직 그 길이 멀고 험란하지만 우리들이 힘차게 통일의 길을 열어갈 것이니 홍동근 스승님이시여, 이제 조국땅에서 편히 잠드소서.

참 기독교인이자 통일운동의 선구자이신 선생님, 주체사상과 기독교가 그 본질이 서로 다르지 않고 바로 사람이 이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남과 북이 서로 원수된 것을 풀고 화해하고 통일을 이루자고 설파하신 선생님, 이곳 조국땅 애국열사릉에서 수많은 애국자들과 함께 편히 잠드소서. (2015.5.14.)

  

CJ Kang
미국 시애틀에서 <사람사는 세상 시애틀 한마당>(hanseattle.com)을 공동운영하고 있으며 <사람사는 세상을 위한 시애틀 모임> 대표를 하다가 현재 고문으로 있다. 또 유권자민주연대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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