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정상회담 특집1]스탈린은 왜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나

[북러정상회담 특집1]스탈린은 왜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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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제1위원장이 5월 9일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로 밝히면서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북러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북한-러시아, 나아가 북한-소련 관계의 역사를 돌아보고 최근 북러 관계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집중 분석해보고자 한다. 

러시아 제2극동전선군 88독립보병여단 1대대장

북한의 역사를 이해하자면 일제 강점기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 시기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신생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다. 김일성 주석 역시 일찍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 

소련에서 김일성 주석의 존재를 처음 인지한 때는 보천보 전투가 있었던 1937년으로 보인다. 소련의 고문서에 김일성 주석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게 이 시기다. 이후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일본과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고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부대에게 소련 극동지역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당시 항일부대들은 새로운 정황에 맞춰 대부대 활동을 중단하고 소부대 활동으로 전환한 상태였다. 항일부대들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부는 계속 소부대 활동을 하고 일부는 소련 극동지역으로 들어갔다. 소련은 남야영, 북야영 두 개 기지를 제공했는데 김일성 주석은 남야영 책임자가 되었다. 

1942년 소련은 극동 뱌츠코예 북야영에서 제2극동전선군 산하 88독립보병여단을 창설했다. 처음 소련은 조선인, 중국인들에게 자신들의 부대에 들어올 것을 요구하였다가 거센 반발을 샀다. 결국 각 민족이 독자성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국제연합군을 만드는 것으로 정리됐다. 중국은 88여단을 <동북항일연군교도려>라고 불렀다. 러시아, 중국, 조선 등 15개 민족으로 구성된 88여단 내에서 김일성 주석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1대대의 대대장 지위를 가졌다. 김일성 주석은 여단창설 전부터 만주 동남 일대에 남아있는 소부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지속적으로 만주를 다녀왔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 소련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88여단에서 함께 근무한 한 러시아인은 “군사업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명석하고 근면했다”고 회고했으며, 소련군 지도부도 “모범적이며 뛰어난 부하 통솔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항일부대 지휘관인 저우바오중(周保中)도 “가장 훌륭한 군사 간부이며 중국 공산당의 한인 동지 중에 가장 우수”하다고 소련에 소개했다. 후일 88여단이 편입된 제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Лебедев) 소장도 “상당히 유능하고 박력 있는 지휘관처럼 보였으며 매우 쾌활한 성격이어서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88여단도 제25군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였고 소련군도 20일 이후 전투행위를 모두 중단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한반도에서만 1963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당시 소련군 일부는 이미 서울까지 진입했으나 다시 38선 이북으로 철수하였다.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북한 주민들에게 해방군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 약탈행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스탈린 서기장은 1946년 1월 “북조선 인민들을 괴롭히는 군인들을 붙잡아 즉시 총살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실제로 여러 군인들이 총살당했다. 장교들은 계급을 박탈당하고 본국에 소환돼 군사재판을 받기도 했다. 1946년 소련군정이 몰수해 간 흥남비료공장도 이듬해 흥남에 다시 돌려보냈다. 

북한 건국을 지원한 소련

소련군정은 일제 잔재 청산과 북한인 자치권 인정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모든 지역 정부기관과 사업장에 북한인으로 이뤄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일본인과 친일세력들은 대부분 쫓겨났다.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북한은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고 1948년 9월에는 정식 정부를 출범하였다. 

그러나 북한 건국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그동안 행정기관, 산업시설, 교육기관 등 모든 분야를 통제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사라지면서 전문인력에 심각한 공백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소련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파견해 북한의 건국 사업을 도왔으며 북한 학생들의 유학도 받아들였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건국 과정에 소련이 깊이 개입했으며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은 중국 동북부와 소련 극동의 통로라는 지정학적 이익 정도만을 얻고자 했다고 한다. 소련 입장에서는 동유럽에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탈린 서기장도 한반도는 주로 농업지대로 노동자 비율이 매우 낮아 동유럽과 같은 사회주의 건설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안토노프 참모총장과 연명으로 1945년 9월 20일 소련 극동사령관 및 제25군에 <북조선에서 소련군과 현지정권기관 및 주민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7개항의 훈령을 내렸다. 이 훈령은 최고 기밀로 분류돼 1993년에야 공개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군(赤軍) 군대에 의한 북조선 점령과 관련하여 최고 총사령부는 다음의 지시에 따를 것을 명령한다.

1. 북한 영토 내에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2.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3. 적군에 의해 점령된 조선 지역에서 반일적인 민주적 제 단체 및 정당의 조직을 방해하지 말 것이며 그 작업을 도와줄 것.


4. 현지 주민들에게 다음을 설명해 줄 것.

a) 적군은 일본 약탈자들을 분쇄할 목적으로 북조선에 진주한 것이며, 조선에 소비에트 제도를 도입하거나 조선영토를 획득하려는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

b) 북한 시민의 사유 및 공유재산은 소련군 당국의 보호 하에 있다.


5. 현지 주민들로 하여금 평화적 노동을 계속하고, 산업 및 상업 기업 그리고 공영 및 기타 기업의 정상적인 작업을 보장하며, 소련군 당국의 요구와 명령을 이행하며, 공공질서의 유지에 협조하도록 호소할 것.


6. 북조선 주둔군에게 기율을 엄격히 지키고,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예의바르게 행동하도록 지시할 것. 종교 의식과 예배를 방해하지 말 것이며, 사원 및 기타 종교시설 들에 손을 대지 말 것.


7.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


스탈린

안토노프

1945년 9월 20일

당시 소련은 북한이 자체 힘으로 나라를 세우기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역할은 이 과정을 주도하기보다는 지원하는 수준으로 제한하였다. 군비와 병력도 부족해 북한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1946년 3월 1일 3.1운동 27주년 기념행사장에서 폭탄테러를 당했다. 당시 평양에서 근무하던 노비첸코 소련군 소위가 수류탄을 잡아 몸으로 덮어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노비첸코는 외투 안에 있던 책이 충격을 막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후 노비첸코는 북-소 우호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퇴원 후 러시아로 돌아가 평범한 농민으로 살았는데 1984년 김일성 주석이 소련을 방문하면서 그를 찾아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고 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외국인 최초로 북한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아파트와 각종 선물도 받았다. 또 북한과 소련은 노비첸코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영원한 전우>를 공동제작했다. 노비첸코는 김일성 주석과 같은 해인 1994년 12월 사망했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곧바로 10월 12일 소련과 국교를 맺는다. 12월에는 소련군도 철수하여 독립국가의 형식을 갖췄다. 

김일성 주석은 1949년 3~4월 약 1개월 동안 소련을 최초로 공식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양국은 북한 경제발전 2개년 계획 수행을 위한 소련의 경제지원을 포함해 다양한 내용들을 합의했다. 기술 지원, 2억 루블(4천만 달러) 차관 공여, 전문가 파견, 아오지(경흥군)-크라스키노 간 철도 부설, 북-소 간 항공노선 운행, 교수·교사 파견, 북-소 간 제반 분야 협정 체결 등이 포함되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이 신생국가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 있었지만 무상 원조를 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소련은 3년에 걸쳐 차관을 제공하고 이후 3년 간 상환하며 이자는 1%로 제시하였다. 이후에도 대북 지원 대신 북한의 사암을 반입하기도 하였다. 

북한은 스탈린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이후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를 필두로 소련과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들이 스탈린을 비난하였지만 북한은 달랐다. 1985년 평양에서 출판된 철학사전에도 스탈린을 레닌의 계승자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의 탁월한 활동가로 묘사하였다.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스탈린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는 게 정설이지만 실제로 소련의 지원은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엔 안보리를 보이콧하여 유엔군 창설을 방치한 것은 결정적이었으며 약속한 무기를 비롯한 군수품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미온적인 군사원조를 지적했다. 

북한 역시 소극적인 소련에게 불만을 표했다. 김일 민족보위성 문화부상은 소련고문에게 “우리가 필요한 것은 고문들이나 그들의 조언이 아닌 실질적 지원이다”고 거칠게 표현했고 이 때문에 소련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일은 1952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등용되었다. 

소련은 미국을 의식해 모든 군사지원을 비공개로 하였다. 예를 들어 공군병사 2만6천 명과 전투기 300여 대를 지원하였는데 공군병사들을 러시아계 중국인 소수민족으로 위장했다. 

당시 소련이 왜 북한을 충분히 돕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들이 있다. 스탈린은 1950년 8월 27일 고트발트(Gottwald)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유엔 안보리 보이콧 이유를 설명했다. 안보리에 중국 대표로 국민당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서한은 2005년 김동길 베이징대 교수가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하여 공개했다. 

그러나 서한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면 주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유럽에서 극동으로 관심을 돌리고 군사력을 손실해 3차 세계대전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유럽 사회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소련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서한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보낸 것임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즉, 동유럽 국가들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서한이라는 것이다. 소련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국의 전후복구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견해로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국전쟁을 활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세기 전 국토통일원 장관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 전 장관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대일본 전쟁 참전을 요청하면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를 소련에게 주겠다는 밀약을 했다고 한다. 소련은 장제스(蔣介石)의 아들 장징궈(蔣經國)의 서명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뚱(毛澤東)은 이 밀약을 인정할 수 없었다. 1949년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뚱은 한 달이 넘게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격론을 벌였고 만주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에 스탈린은 중국이 소련 중심의 국제 사회주의 체제 안에 들어오지 않고 소련과 동등한 사회주의 국가가 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애치슨 선언을 통해 대만을 자국 도서방어선에서 제외하고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대중 화해 메시지를 던졌다. 미국과 대결 중인 소련 입장에서 중국이 미국과 한 편이 되면 고립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하면 양국 모두 국력이 소진되고 그 사이에 소련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스탈린 시기 소련과 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소련과 중국이 본격적으로 대립한 것은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1950년대 중반부터라는 것이다. 특히 일제 패망 후 소련은 만주지역을 지배하지 않고 철수했으며 만주지역에서 진행된 국공내전에 직접 개입한 기록도 없다.  

또한 2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소련은 당시 국내 전후복구에 힘을 집중하려 했으며 이 때문에 국제 문제에서 중립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 내전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분쟁에 중립을 표방하고 공산당을 소극적으로 지원하는 데 그쳐 공산주의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중국-대만 갈등, 중국-인도 갈등에서도 중립을 표방했고 심지어 중국의 국공내전에서도 중립을 표방해 중국 공산당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소련이 한국전쟁에서 중립을 표방한 것도 이런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 초기 유엔 안보리를 보이콧한 것도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겠다는 입장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3차 세계대전을 방지하기는커녕 오히려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런 견해에 비춰보면 소련은 국경을 마주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소련은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적극 지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소련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탈린 서기장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형식적으로 놓고 볼 때 소련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고 개입하지 않는 방침을 정했지만 비밀리에 공군력을 비롯해 다양한 지원을 했으므로 오히려 나름대로 적극 지원했다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등장하면서 북-소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계속)

* 참고자료

박종수, ≪21세기의 북한과 러시아≫, 오름, 2011.

션즈화(沈志華)/최만원 역,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 선인, 2010.

소련 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편/국토통일원 역,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 1945~1980: 문헌 및 자료≫, 국토통일원, 1987.

문경환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1 comment

  • 1991년 구소련 국방성 직속 군사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인 코르트코프 박사는 스탈린이 주도하여 6.25를 일으켰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전쟁이 일어나기 2달 전부터 소련 극동반구에서 전쟁에 대비한 특별 기동훈련이 실시됐다는 사실도 밝혔지요.
    극동반구에서 기동훈련을 실시한것은 당연히 소련군이며 북한군 단독으로 소련땅에서 훈련을 할수없지요.
    다시말하면 6.25개전시 소련군과 북한군이 연합작전을 폈다는 뜻입니다. ( 소련군 참전 )

    코르트코프 박사는 직책상 소련의 극비문서를 누구보다 많이 보았고 소련 국가기관 종사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스탈린이 6.25를 일으켰다고 발표한것은 100% 신뢰할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1/1849097_134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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