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Kang 방북기26]평양방직공장의 노동자를 위한 복지제도

[CJ Kang 방북기26]평양방직공장의 노동자를 위한 복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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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CJ Kang께서 2014년 9월 3~11일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NK투데이는 필자와 협의 아래 방북기를 연재합니다. 

필자의 승인 아래 원문의 표현 가운데 일부를 한국 실정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외부 기고는 본사 입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평양방직공장에서 7년 동안 근무했다는 강창숙 해설원의 안내로 혁명사적교양실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두 여성이 우리를 반겨 맞이해준다. 이곳 노동자들과 직접 대화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을 위한 배려로 이분들이 나온 것이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빙 둘러 만들어놓은 좋은 벤치가 있어 거기 자리를 잡고 대화를 나누었다.

한 분은 노력영웅 전옥화 선생으로 올해 77세가 된다는데 1951년부터 2009년 까지 근 60여년 동안 이 공장에서 일하였다고 한다. 아직 건강한 모습의 이 분은 평양방직공장 역사의 산 증인이다. 평안북도 빈농 출신으로 전쟁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이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평생을 한 길을 걸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 미국이 조국에 가한 처참한 광경들을 직접 목격하였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자신이 공장에서 열심을 다하여 일하는 것으로 나라와 인민에 기여하기로 마음먹고 평생을 열심을 다해 이곳에서 일한 것이다. 

전옥화 선생은 1977년에 북부조국 최고의 영예인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중국과 러시아 헝가리 몽고 등지로 보상여행을 배려받았다고 했다. 아들 딸 하나씩 두었고 손자 손녀도 있어 남은 여생을 연로보장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신다.

다른 한 여성은 선군시대숨은공로자(숨은영웅) 리명순 씨로 올해 38세라고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방직공장 기능공 학교를 마치고 이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서거 소식 들었을 때가 그의 나이 18세였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당시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나라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각오로 다음 달인 8월부터 직포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일을 조금씩 익혀가면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일했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이 그 어려웠던 제2의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언제나 목표량을 두 배 세 배 초과달성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를 안내하며 대화를 통해 조금 친해진 강창숙 해설원에게 우리 조국의 통일을 위해 내가 궁금해하던 여러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고 한다. 그래 공장의 현황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보았고 또한 그동안 이곳 인민들의 생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는 되었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북부조국에서 처음으로 인터뷰하게 되었다면서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고 다음과 같은 답을 들었다.

평양방직공장의 위치는 평양시 동평양 선교구역 강안동이다. 이곳에선 방적공장과 직포공장 모두 있는데 실을 뽑기 위한 정방기는 예전부터 있던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제직기로는 유연창대직기를 사용하는데 이 기계는 북에서 직접 생산하는 기계라고 한다. 내가 무명의 원료가 되는 목화는 어떻게 구입하느냐고 물어보니 목화는 외국에서 수입한다고 했다. 

이곳 평양방직공장에선 매년 필요한 인원이 있을 터인데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 신청하는 젊은이들의 상황은 어떤가하고 물어보니 지금까지 필요한 인원은 늘 지원하는 사람들로 충분히 메꿔졌다면서 올해의 경우 200여 명이 새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 17살로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이곳 기능공 학교에서 6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졸업한 후에 직장에 배치된다고 하였다.

모두 8,500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는데 미혼의 직원들은 합숙소에서 생활하고, 기혼자들은 평양 시내의 살림집에 살면서 공장버스로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곳 평양방직공장은 여성 직원들의 숫자가 많고 남성이 적으므로 남성들이 일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미혼 여성이 결혼을 하게 될 때 그 배우자가 이곳 평양방직공장에서 함께 출퇴근하며 일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 남자들이 이곳에서 할 일이 별로 없지 않으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면서 기계 수리공, 차량들의 운전수, 보일러 담당, 그 외 공장 부속의 여러 사업소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많은 직장에서 남성들을 오도록 하여 함께 일하도록 하는 취지가 참 신선하다.

내가 가장 궁금해하던 이곳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물어보면서 그동안 내가 만나서 대화했던 식당이나 호텔의 봉사원들은 월급 6천원에 상금 5만원으로 모두 5만6천원을 받는다고 하던데 이곳 노동자들의 수준은 어떤가하고 물어보았더니 강창숙 해설원은 살짝 웃으면서 ‘우리 월급은 그 두 배가 넘습니다’라며 거기에다 생산량에 따라 차등해서 분배한다고 말해준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일하면서 생산량을 높이면 그에 따라 분배도 많아진다는 이야기다. 사무직보다 노동자들이 훨씬 나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같은 노동자들인데도 일급 호텔의 봉사원들보다 이곳 북부조국의 공장 노동자들은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미 얼마간 알고는 있었지만 강창숙 해설원과의 대화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노동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복지혜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주택은 무료다. 쌀은 배급으로 필요한 양을 공급받게 되며 김치를 담기 위한 배추도 세대 수대로 공급하고, 부식물은 공장 안에 매대가 있어 거기서 값싸게 구입이 가능하다. 거기다가 노동자들의 부식을 위해서 다양한 후방공급소가 있는데 단천에는 수산기지가 있어 거기서 직접 잡은 수산물을 공급한다. 젓갈과 까나리젓까지 공급하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부업기지가 있어 강냉이 등 농산물도 공급하고 오리 닭 돼지를 농장에서 사육해서 고기를 공급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건 정말 뜻밖의 일이다. 우리처럼 시장에서 무엇이든지 돈으로 살 수 있다면 굳이 공장에서 이렇게 노동자들의 부식제공을 위한 사업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직은 북에서 편리하게 필요한 식재료들을 충분히 집에서 가까운 시장에서 구입할 수 없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제2의 고난의 행군 시절을 거치면서 부족한 음식물 재료를 직접 생산해낸 전통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충분하게 부식을 공급하기 위해서 공장에서 직접 부식 생산까지 맡아서 제공하고 있다하니 노동자들을 위하는 그 정신을 내가 기억해야 할 것 같다. 

평양방직공장의 부지 면적은 64만6천 평방미터로 웬만한 고을만한 면적이라고 한다. 그래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탁아소와 6살 까지 다니게 되는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선생님들도 모두 공장 소속이라고 했다. 공장 소속의 병원도 있는데 수술이 가능한 곳으로 입원실도 있다. 료양소도 운영하고 있는데 노동자들이 신경통이나 질병이 생겼을 때 40일 동안 요양하고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노동정양소도 있는데 이곳은 혁신자들을 보내어 식사의 질을 높여서 보양해주는 곳이라 한다. 

노동자들의 문화생활에 대해서 물어보니 연극이나 공연은 국가에서 표가 나오고, 옥류관 청류관 등의 식당은 천 원 정도의 금액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고, 여행을 가기도 하느냐고 물어보니 당연하다면서 예를 들어서 멀리 견학으로 백두산 답사권이 주어지기도 하는데 그곳 신흥지구 비밀근거지 등을 답사하러 간다고 했다.

노동자들이 언제 쉬느냐고 하니 일요일과 국가 명절에 쉰다고 한다. 마침 추석 직전이라 추석 때는 어떻게 고향으로 가는지를 물어보니 직장에서 지역별로 가는 차들을 준비해서 고향으로 가게 하는데 보통 2~3일 후에 돌아올 때는 자체적으로 평양으로 돌아오는 차편들이 많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북부조국에선 주택과 쌀을 무료로 제공하고 학생들의 교복까지 제공하지만 그래도 인민이 입을 옷은 스스로 구입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괜찮은 옷을 구입하려면 얼마 정도 하느냐고 물어보니 2만 원에서 3만 원 정도라고 한다. 노동자들의 월급에서 옷을 구입하기 위해 지출되는 금액은 다른 비용에 비해서는 높은 편이지만 따로 주거비용이나 교육비, 의료비의 부담이 없는 것을 고려할 때 그리 비싼 것 같지는 않다.

대량생산에 대량소비, 그리고 무역의 자유화로 우리들은 일상용품들을 아주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한편으로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것을 잘 보존해야 하고, 하나밖에 없는 이 지구의 주어진 환경을 깨끗이 유지하기 위해서 무한정으로 생산되는 상품의 구입 또한 절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절에 모두가 검소하고 절약해서 살아간다면 경기하락에 공황으로 이어져 생산과 유통에 큰 혼란을 주게 되고, 그걸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 자체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소비성향을 부추겨서 대량소비로만 유지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때 우리 사회에서도 절약과 검소한 생활이 본이 되는 시절이 있었고 그것을 국가에서 권유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생필품이 부족하다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불행은 그것보다는 편히 쉴 집이 없다거나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없어서였고, 돈이 없어 자녀들의 교육을 못 시킨다거나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거나 부정과 부패한 정치와 사회로 억울한 일을 당한 것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시장에 나가면 값싼 생필품이 넘쳐나지만 그것을 우리가 구입할 수 있다해서 우리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수입에서 아주 많은 부분을 우리는 주택, 교육, 교통 혹은 차량유지, 의료, 보험, 통신, 문화생활 등에 사용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들을 옭아매게 만들고 수입이 충분하지 못할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도록 만든다.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정된 직장을 원하지만 모두가 그런 직장을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의 직장에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도 큰데다 그것마저도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며, 그런 날이 오면 그야말로 의식주를 해결할 방법이 캄캄해지니 우리가 날마다 불안 가운데서 살게 되고 걱정근심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생활고로 인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살에 까지 이르진 않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안한 심정을 우리 사회에서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는가? 직장을 구하지 못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넘쳐나는데도 먹거리와 생필품이 흔한 곳에 우리가 산다해서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이 떡으로만 행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준 김정숙평양방직공장의 강창숙 해설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2014.11.28.)

CJ Kang

미국 시애틀에서 <사람사는 세상 시애틀 한마당>(hanseattle.com)을 공동운영하고 있으며 <사람사는 세상을 위한 시애틀 모임> 대표를 하다가 현재 고문으로 있다. 또 유권자민주연대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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