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방북기3]유골에는 사상과 이념이 없다

[최재영 목사 방북기3]유골에는 사상과 이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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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 부터 10월 6일 까지 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편집자 주: 통일뉴스 동시 게재


우리 민족은 그동안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을 목적으로 주입한 “단군은 원래 곰이었고 너희는 그의 자손”이라는 의도적 왜곡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당했으며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교묘한 왜곡을 그대로 믿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일제는 오히려 자신들은 2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민족이라며 근거 없이 주장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조선이 주장하는 5천년 역사는 신화와 전설에 불과하며 <조센징>들은 곰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물론 일제가 주장한 것은 13세기 후반 고려 충렬왕 때 저술된 일연의 삼국유사와 동시대의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이편(紀異篇)에 등장하는 단군신화는 중국의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등을 인용했는데 실제로 정사(正史)에 속하는 위서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으며 고기라고 지칭한 것은 정확히 어떤 사서들인지 알 수 가 없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삼국유사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줄곧 일제 강점기까지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단군 관련 역사서들과 연구서들은 모두 배제시키고 단군신화가 주는 참된 의미와 교훈을 악용하였다. 의도적으로 조선의 친일학자들과 관제 역사학자들을 동원하여 은밀하면서도 줄기차게 우리민족의 시조(그가 단군이든 아니든 간에)에 대한 정통성을 비하시키고 왜곡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려서부터 단군 역사를 단지 신화로서만 취급하여 아예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해 왔으며 특히 나를 포함하여 현대의 기성 종교들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역사 속에 실존하는 단군을 마치 우상을 대하거나 미신을 믿는 대상처럼 여겨 왔고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는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훼손하는 사건들도 자주 발생하기까지 했다. 우리의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타의에 의해서 오랜 세월을 멀어졌던 것이 단군을 향한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근대 평양 단군릉의 변천사>

우리 몸에는 단군의 피가 흐른다

이런 상황에서 단군이 우리나라를 건국한 날인 단기 4347년(서기 2014년)이 되는 개천절을 오늘 평양에서 맞이하게 됐다. 평양시 강동군에 소재한 단군릉에서 개최되는 올해의 개천절 행사는 특별히 단군릉 개건 공사 준공 2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공동행사로 열리는 날이었다. 그동안 남북이 공동으로 행사를 치르다가 2005년을 마지막으로 행사를 치른 후 5.24 대북조치 이후 장기간 단절됐다가 이번에 우여곡절 끝에 남북의 대표들이 9년 만에 만남이 성사되어 행사를 여는 뜻 깊은 날이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역사적인 현장에 참석할 생각에 가슴이 아주 설랬다. 그러면서 갑자기 지난 4~5월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 어느 행사장에서 마주친 북측의 어느 대학 교수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최선생님. 이번에 미국에 돌아가시면 선생님이 이끄시는 학술원에서도 단군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 보십시오. 우리 민족의 몸속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단군의 피가 뜨겁게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아, 하하하! 그러게요. 그런데 저는 왜 그런지 평소에도 단군 할아버지가 저의 몇대조 할아버지나 이웃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아, 참, 다행스런 일입니다. 우리 공화국에서는 일찍이 단군릉을 조성해서 단군님의 유골을 정중히 모셨는데 그걸 보고 남쪽에서는 정치적으로 운운하면서 왜곡되게 해석하는 세력들이 간혹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골에 무슨 사상과 리념이 있갔습니까?”

그와의 대화는 망각하고 있던 내 몸속에 흐르는 핏줄의 정체를 더욱 진하게 해 주는 것만 같았던 당시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북측에서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3년 9월에 김일성 주석의 전권적인 특별지시로 단군릉을 재발굴하여 개건공사를 시작해서 1년만인 1994년 10월에 준공을 마쳤으며 그 후 대내외적으로 단군이 우리 민족의 원시조이며 고조선의 건국시조로서 실존 인물임을 만방에 입증하였다. 종교를 떠나서 기독교 목회자인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의 개천절은 분단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필수적 요소이며 비록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한국인은 철저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단군사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개천절 노래 첫 가사처럼 지구상 어느 국가, 어느 인간이든 시조와 조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아무튼 이제라도 남북이 어렵사리 다시 만나 우리 조상의 뿌리를 찾고 기념하는 일을 함께 한다니 참으로 민족화합과 통일과업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민족은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도 단군정신을 구심점으로 면면히 이어 왔기에 서기(西紀)를 사용하기 이전까지는 단기(檀紀)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또한 대한민국의 최초 헌법전문 제1장 제1조와 현행 대한민국 교육법 제1장 2조에는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국가와 교육의 기본이념으로 명시하고 결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9년만에 이뤄진 남북합동 개천절 행사

 

우리 일행은 아침 8시에 호텔을 출발해 평양시내 개선문 옆에 있는 대형 주차장에 집결했다. 그곳에서 다시 대형버스에 옮겨 타고 평양에서 35km 정도 남짓 떨어진 단군릉으로 향했다. 평양에서 동쪽 방향으로 1시간 정도를 마구 달리던 버스는 어느덧 산기슭을 지나 나무들이 울창한 숲속을 통과하여 단군릉의 좌측면으로 통하는 샛길에 조성된 간이 주차장에 내려주었다. 나는 남들보다 재빠르게 하차하여 움직였다. 오솔길을 5분 정도 걸으니 드디어 나의 눈앞에 백색 화강암으로 축조된 피라미드 모양의 거대한 단군릉이 나타났다. 

간결하면서도 단아함의 멋을 갖추면서도 위용을 풍기는 모습에 압도당하여 잠시 걸음을 멈칫하며 감상했다. 순간 “저 어마 어마한 돌들을 모두 다 어디서 가져왔을까?”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무덤 앞 광장을 바라보니 벌써 남녀 주민들이 형형색색 한복과 양복들을 곱게 차려입고 행사장 무덤 구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때마침 북측의 국가행사 진행을 총괄하는 어느 국장이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준비하는 것이 눈에 띄길래 그를 붙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벌써, 웬 주민들이 어디서 저리 많이 오셨습니까?”

“아, 최선생님 오셨습니까? 여기 단군릉이 강동군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단군릉을 관리하고 아끼는 강동군 주민들이 모두들 아침 일찍 나와서 해외 동포분들과 남조선 대표단을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단군릉 앞 화강암 광장 바닥에는 어른들은 물론 청년 학생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줄을 맞춰 서서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광장 아래 가파른 계단 아래까지 주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서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곧 행사가 시작된다는 신호가 보내졌다. 대기하고 있던 36명의 남측 방문단과 나를 포함한 우리 해외동포단들이 줄을 지어 입장하려고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단상에 직접 도열하거나 연설 순서를 맡을 남북의 대표들은 우리 보다 나중에 입장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들을 뒤로하고 서서히 줄을 지어 입장했다. 순간, 행사장에 입장하는 우리들을 향해 강동군 주민들이 일제히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뜨겁게 보내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열광적으로 오랫동안 박수를 쳐주니 민망하여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윽고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최종적으로 남아있던 18명의 남북 대표들이 나란히 입장하면서 개천절 공식 행사가 시작됐다. 

북측은 전반적으로 오늘의 행사를 국가적 행사와 종교적 행사로 간주하여 적절히 조화를 이뤄 준비한 듯 했다. 북측대표 중에는 평소에 잘 아는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을 비롯해 한눈에 봐도 알아 볼 수 있는 종교계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조선적십자사 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강수린 조선불교도연맹 위원장, 조선카톨릭중앙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장재언 조선종교인협회장을 비롯한 유력한 인사들이 제일 선두에 섰다. 그 뒤를 이어 김영대 민화협 북측회장, 김완수 6.15실천 북측위원장, 최진수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 등이 입장했다. 

연이어 남측대표로는 신사적인 용모를 풍기는 김삼열 상임준비위원장, 김인환 천도교 중앙종무원장, 이름을 알 수 없는 스님 한분, 그리고 남측 대표단으로서 이미 다섯 번째 남북공동 개천절 행사를 참석하는 백범 김구의 비서 출신인 김우전 선생이 노구를 이끌며 지팡이를 짚고 등단했고 그 옆에는 수염과 흰두루마기가 멋스러운 장두석 선생이 긴장하는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행사 사회는 북측의 김철훈 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과 남측의 윤승길 행사준비위 사무총장이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공동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순서로 북의 김영대위원장과 남의 김인환 종무원장이 축하 연설을 했고 두 번째는 북의 윤정호 단군민족통일협의회 부회장과 남의 김삼열 상임준비위원장이 각각 대표 연설을 했다. 

이어서 남측의 여성과 북측의 남성이 대표로 등장하여 마치 커플처럼 다정히 서서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해내외 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때였다. 호소문을 읽어 내려가는 남측 여성의 목소리가 힘차게 장내에 울려 퍼지자 약간 지루해 보이던 북측의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선언문을 읽는 남측 여성대표를 향해 카메라 세례를 퍼부었다. 

끝으로 이 행사의 클라이맥스인 천제의식이 거행됐다. 올해는 남과 북, 해외 대표 3자로 구성된 ‘천제(天祭) 봉행단’들이 각각 5명씩 동수로 의식을 집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례의식이 시작되기 전에는 고구려 갑옷을 입은 8명의 병사들이 제단 우측에서 특이한 모양의 거대한 금속성 뿔 나팔을 불며 제례가 시작됨을 알렸다. 나팔 소리가 끝나자 부드러운 아리랑 선율에 맞춰 제일 먼저 흰옷을 차려입은 남측 대표단의 제례가 시작됐다. 제례위원 중에는 시국 무용가이자 인간문화재로 유명한 서울대 무용과 교수 출신인 이애주 선생도 참석하여 머리에 흰 족두리와 제례복을 갖춰 입고 제례에 참여했다. 

이애주 교수는 이날 3부 순서로 마련된 축하공연 도중에서 즉흥적으로 무대에 나와 여러 번에 걸쳐 흥겨운 춤을 춘 것 때문에 북측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어서 양복을 입은 채로 북측 대표단이 제례를 올렸고 마지막으로 그 뒤를 이어서 재일교포 위주로 구성된 해외동포 대표단이 정성스레 제례를 드림으로 개천절 본 행사를 모두 마쳤다. 본 행사를 마치고 우리들은 영내에서 각각 자유롭게 기념촬영을 하며 단군릉 본체 주변을 돌며 관람을 하였으며 곧 이어 2부 순서로 단군 부부의 유골이 안치돼 있는 석조 묘실 관람을 위해 입장하였다.

입장료 100유로의 단군부부 유골을 친견하다

단군릉 본체 둘레를 관람하는 시간이 되자 헤드셋을 머리에 착용한 여성 해설사가 개나리 보다 샛노란 한복(조선옷)을 곱게 차려입은 채로 손에는 휴대용 메가폰을 든 채로 차분하면서도 힘차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계신 이 무덤은 높이가 22미터인데 한 변의 길이가 50미터입니다. 특히 우리 위대하신 수령님께서는 무덤이 준공되는 해를 1994년으로 잡아 주셨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화강석을 무려 1,994개를 다듬어 아홉단으로 쌓아 올려졌습니다. 또한 입구에 위치한 기념비는 높이가 8미터, 무게가 25.5톤에 달하며 양쪽에 서 있는 돌기둥은 가장 낮은 것이 1.5미터이며 가장 높은 것이 10미터입니다. 네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는 호랑이 조각상은 높이가 3.5미터, 길이가 5.7미터이며 무게가 무려 80톤에 달합니다. 또한 단군을 보좌하는 여덟 개의 석인상도 각각 높이가 5미터에 무게는 25톤에 이르고 있습니다……”

해설사의 입에서는 지칠 줄 모르고 거미줄에 실 나오듯 연신 수치와 통계를 외워대고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걷다보니 어느덧 묘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원래 이곳 단군릉을 방문하면 관광객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습니다. 입장료 외에도 관속에 모셔진 단군님 내외분의 모습을 직접 보시려면 추가적으로 100유로(미화 140달러)를 지불해야 이곳 묘실에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개천절이기 때문에 해외동포 대표단과 남조선 대표단들은 모두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단군릉의 총 부지면적이 45정보(13만 5천평)에 달하며 경내에 사용된 돌판들은 모두 7만 2천장이 사용됐는데 이 면적을 합하면 2만 5천 400 평방미터에 달합니다. 이런 큰 면적과 시설들을 유지하고 보수하기 위해서는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입장료는 결코 비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오늘은 공짜라니 날아갈듯 기쁘다. 묘실에 입장하여 단군의 유골이나마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치 태고의 신비경으로 진입하는 듯했다. 해설사의 표정이 진지해지면서 갑자기 약간 울먹이는 표정으로 해설이 이어졌다. 

“우리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생애 마지막까지 단군릉 개건 대역사를 친히 현지 지도하시며 일일이 설계도면과 기술적인 문제들을 보살펴 주시면서…”

실제로 김일성 주석은 단군릉 개건사업의 완성을 3개월 남겨두고 운명했으며 그 뒤를 이은 김정일 위원장에 의해서 1994년 10월 29일에 준공을 보게 된 것이다.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경에 운명을 달리한 김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임박한 정상회담 준비를 하는 바쁜 와중에도 7월 6일에 ‘단군릉 설계를 일부 고치기 위한 안’ 이라는 제목의 정무원(단군릉복구위원회) 보고서 문건에 친필로 서명 할 정도로 임종 직전까지 단군릉 공사에 대해 큰 애착을 가지며 적극적으로 진두지휘하였다. 


90년대 초반까지 북측 학자들 사이에 단군릉과 관련된 여러 학설과 논쟁이 가열되자 김 주석은 “학자들은 논쟁만 하지 말고 직접 발굴해서 사실 여부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그 결과로 단군릉에서 발굴된 두 사람의 뼈가 모두 86개 나왔으며 이에 고무된 사회과학원 학자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직접 측정기계를 구입하여 연구하기도 했으며 서로 다른 두 곳의 연구기관에 소위 ‘전자 상자성(SPIN) 공명법(電子常磁性 共鳴法)’ 이라는 연대 측정을 다수에 걸쳐 의뢰하여 한 곳에서는 24회, 또 한 곳에서는 30회, 총 54회에 걸쳐 연대측정을 했다. 그 결과 유골의 연대치 측정은 1993년 10월 당시 기준으로 5011 ± 267년(오차 5.4%)으로 결론이 났으며 그 후부터 이 유골은 단군 부부의 유골로 공식 인정됐다고 전해진다.

묘실 입구를 들어가서 계단 아래로 내려가니 침침한 조명아래 마치 피라미드 미로같이 좌우측으로 돌면서 꺾어지는 구조로 통로가 설계 되어 있었다. 방문객들에게 등을 떠밀리듯 걷다보니 어느덧 묘실에 쉽게 당도했다. 묘실 정면에는 남측에서 자주 접하지 않았던 근엄한 표정의 단군 영정이 걸려 있었고 붉은 색에 가까운 옻칠을 한 커다란 목관이 좌우로 각각 모셔져 있었다. 

일단 묘실에 당도하는 입장객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영정이 정면으로 보이면 표지판 앞 홀더 앞에 차례대로 멈춰야 한다. 그리고 서너 사람들과 더불어 영정을 향해 잠시 묵례를 올리며 참배를 해야 하고 참배를 마치면 왼쪽으로 꺾어지는 통로를 따라 목관 앞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 참관 규정이다. 

묘실 왼쪽 통로에 먼저 나타나는 관이 바로 단군의 유골이다. 그리고 우측으로 돌면 바로 나오는 관이 단군 아내의 유골이다. 유골이 모셔진 관들은 두꺼운 특수 유리로 제작됐으며 나무로 된 목관 안에 유리관을 넣은 방식이었다. 아마도 빛을 차단하기 위해 유리관 위에 목관을 덧씌운 것으로 보인다. 밀폐된 유리관 속에는 유골의 부식과 변화를 막기 위해 아르곤 가스(Argon Gas)를 채웠다고 한다. 묘실내부의 공기나 온도는 매우 신선했으며 아마도 통풍과 습도 온도 등을 조절하는 특수한 자동화 시스템이 작동되는 듯했다. 

50세 가량의 나이로 추정 되는 단군의 유골을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해골이나 몸통 뼈대는 전혀 없고 거의 팔다리 뼈 위주로 배치되어 누워 있었다.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조각을 맞추듯이 제 위치로 잘 복원해 놓았으며 이미 알려진 대로 단군은 충분히 170cm의 건장한 체격이 되어 보였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 단군의 유골을 마디마디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단군은 지하에서도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수천 년 역사의 고단한 삶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무릎이 아팠는지 유리관속의 마흔 두개의 뼈들은 모두 아파 보였다. 마치 갑자기 비오는 날 겪게 되는 관절의 통증처럼 단군의 모습은 지금 나에게 마디마디 쓰라린 아픔으로 다가왔다. 

다행히도 발굴 당시 단군 부부의 유골은 뼈를 삭히지 않는다는 석회암 지대에 매장되었기에 이 정도라도 보존 상태가 양호했던 것 같다. 발굴 당시에는 모두 86개의 뼈들이 출토되었는데, 머리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로 팔다리와 골반 뼈들만이 남아 있었으며 또한 그 뼈들조차도 각각 있어야 할 위치에 놓여 있지 않고 한쪽으로 서로 뒤죽박죽 엉켜져 있었다고 한다. 죽어서도 부부의 도리와 인연을 놓지 않으려 했었을까? 특히 86개의 뼈들 가운데는 남자의 뼈가 42개이고, 여자의 뼈가 12개이며, 전혀 성별 구분이 안 된 것이 32개였다고 한다. 또한 무덤에는 사람 뼈 외에도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 장식과 돌림띠 조각이 각각 하나씩 나왔고, 여러 개의 도자기 조각과 관에 박았던 여섯 개 정도의 못 등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묘실에 들어온 지 10여분이 지나자 입장한 관람객들이 너무 많아서 서로 밀리고 밟히는 상황이지만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두 분의 유골을 차분히 살폈다. 관속의 부부 유골들은 후손들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서로가 원수로 70년을 지내는 것을 못내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화가 난 듯한 메시지가 느껴졌다. 나는 급기야 뒷사람들에게 등이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묘실 출구로 밀려 나가게 되자 마음속으로 두 분에게 성급히 작별의 인사를 드리며 재회를 기약했다. 

개천절에 만나 뵌 단군 부부는 나에게 거시적으로는 민족통합, 미시적으로는 남북통일이라는 민족 최대의 숙원을 해결해야 할 역사적 당위성을 온전히 깨우쳐 주었던 것 같다. 통일은 우리의 뿌리 역사를 진실 그대로 통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나의 목에 걸려있는 카메라로 묘실 내부와 유리관의 모습을 마음껏 찍고 싶었지만 서슬 퍼런 여성 관리 요원들의 눈초리가 매서워 아예 포기하고 아쉬운 발걸음으로 묘실을 총총히 빠져 나왔다. 밖으로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개천절 행사 마지막 3부 순서로서 마련된 축하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야외 특설 공연장으로 꾸며진 단군릉 계단 중하단부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탑승했다. 

최재영 목사 프로필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The Light of Glory Church 담임목사 역임

소셜무브먼트그룹 NK VISION 2020 설립 &대표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 &동북아종교위원회위원장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해외총회 남가주노회 소속

미국 풀러신학교 대학원 선교목회학 박사

미주장신대학교 대학원 구약학 석사

미주총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교육학

안양대학교 신학과 同 신학대학원

1 comment

  • 5.24조치가 하루빨리 해제되어 대한민국국민들도 자유롭게 북한여행을 할수있기를 간절히 바라는바입니다~! 하지만 2015년 김정은정권이 통일대전을 선포해 도발행위를 한다고하니 참 씁쓸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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