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북한의 협동농장 건설 ② – 농업협동화의 도입 과정

[북한은 왜?] 북한의 협동농장 건설 ② – 농업협동화의 도입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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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협동화를 처음 결정한 것은 1953년 8월 제6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였다.

농업협동화를 일부 경험적으로 추진할 것을 결정했지만, “사유토지와 사유생산도구를 보유하는 원칙 하에서 협동적 농업생산합작사를 광범위 조직”하는 매우 신중한 방법을 선택했다.

농업협동화를 추친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바라본 원칙 2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1) 자원성의 원칙

농업협동화를 실시하면서 중요한 원칙은 ‘자원성의 원칙’이었다.

“농업협동화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은 어디까지나 농민들의 자원에 의해서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협동조합이 좋다고 해서 농민들을 강제로 끌어들이어 그것을 조직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겠습니다.” – 김일성 수상
[김근식, 북한의 혁명적 군중노선 연구, 1991, 43쪽 재인용]

조선노동당은 농업협동화 과정에서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농민에게 실물 교육을 통해 협동경리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협동화를 적극 지지하는 빈농들을 중심으로 매 군마다 2~3개씩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거기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다음 협동화 운동을 대중적으로 발전시켜갔던 것이다.

2) 점진성의 원칙

자원성의 원칙과 함께 북한은 ‘점진성의 원칙’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지켜야 할 원칙은 농업협동조합을 한꺼번에 와닥닥 조직할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각오 정도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농업의 협동화란 몇몇 지도일꾼들의 주관에 의해서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의식 정도, 우리 공업의 발전 정도, 기타 여러 가지 조건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김근식, 북한의 혁명적 군중노선 연구, 1991, 44쪽 재인용]

농민들이 자원적으로, 점차적으로 농업협동화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천편일륜적으로 농업협동화 형태를 규정짓지 않았다.

크게 3가지 형태의 농업협동조합을 농민들에게 추천했다.

제1형태는 토지와 기타 생산수단은 개인이 소유하되 가축이나 농기구만 공동으로 이용하여 작업만 공동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토지 소유자가 개개인의 생산물을 각각 소유하는 일종의 ‘노력 협조반’이었다.

사실상 우리 민족의 전통적 농업방식인 ‘두레’, ‘품앗이’ 수준과 유사했다.

제2형태는 토지와 전반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권을 갖되, 그것을 협동조합에 통합하여 공동으로 경영하고 생산물을 노동일과 출자한 토지에 따라 분배하는 형태였다.

제3형태는 토지와 생산수단을 협동조합이 소유하고 공동경영을 한 뒤 노동력에 의해 분배하는 형태였다.

협동농장 형태별 비교

  가축·농기구 등토지 소유경영분배
1형태공동개인개인개인
2형태공동개인공동노동력·토지 비례
3형태공동공동공동노동력 비례

북한 정부는 이 세 가지 형태 중 농민들이 각자 자신의 경제 현황과 의식 수준에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경계했던 것은 일부 열성적인 사람들이 전체 농민들의 의지를 무시한 채 조합을 조직하는 행위였다.

북한의 농업협동화는 크게 3단계에 거쳐 완성되었다.

제1단계는 1953~1954년 사이의 경험적 단계였다.

이때는 주로 농업협동화를 적극 지지하는 가난한 농민들과 사회주의에 대한 지향이 높은 농민을 중심으로 각 군에 몇 개씩 농업협동조합을 시범적으로 결성했다.

이를 통해 협동경리의 경험을 쌓고 실물교육을 통해 협동화의 우월성을 실제로 보여줌으로써 협동화사업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1953년 조합수 806개(농가 총수의 1.2%, 총경지면적의 0.6%)에서 1년이 지난 1954년 말 조합수 1만여 개(농가 총수의 31.8%, 총경지면적의 30.9%)로 급속히 성장했다.

제2단계는 대중화 단계로서 1954년 11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54년 11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전쟁 중 시작하여 지금까지 진행된 농업협동화 사업의 경험을 총괄적으로 평가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농촌을 사회주의적 발전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은 농업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인정한다”면서 농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공식화했다.

이 단계에서는 조선노동당의 집중적인 도움으로 협동조합에 중농도 적극적으로 가입하기 시작했다.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이 끝난 1956년 말, 농가 총수의 80.9%, 총 경지면적의 77.9%를 포괄한 1만 5천여 개의 협동조합이 꾸려졌다.

이 때 양적 성장에 따른 운영의 부족함, 성급하게 협동화를 추진하려는 경향을 경계하기 위해 ‘양적 성장에 질적 강화를 병행시키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교양사업이 강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1956년 2월 말 협동조합 조직형태는 거의 전부가 제3형태, 조합의 96%를 차지하게 된다.

제3단계는 1957~1958년 8월까지 진행되었다.

1956년까지 평안남도에서는 70~80%가 협동화되었으나 산간지대인 자강도에서는 55.8%, 상업적 농업의 비중이 높았던 평양시 주변에서는 44.6%, ‘신해방지구’인 개성에서는 42.3%밖에 협동화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에는 산간지대나 도시 주변에 중점을 두고 농업협동화를 추진했으며, 특히 도시의 경우 개인상공업의 협동화와 밀접히 결부시켜 진행해갔다.

그렇게 해서 1958년 8월까지 개인 상공업의 협동화와 더불어 농업협동화가 완성되게 된다.

참고자료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김근식, ‘북한의 혁명적 군중노선 연구’, 1991

※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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