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북한이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

[북한은 왜?] 북한이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

Print Friendly, PDF & Email

*한국전쟁을 두고 남북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본 자료와 내용은 전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토대로 한 것이며 NK투데이의 입장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왜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나

1) ‘조국해방전쟁 승리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을 6.25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6.25전쟁을 ‘승리’했다고 배우지 않지만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을 ‘승리’했다고 배운다.

왜 그런 것일까?

북한은 미국의 침략에서 조국을 지켜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연합세력의 무력침공에 반대하여 조선인민이 진행한 조국해방전쟁은 인류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가장 준엄하고 가열찬 전쟁이었다….그러나 조선인민은 유례없이 가열하고 엄혹한 전쟁의 시련을 영웅적으로 이겨냈으며 미제와 그 앞잡이들에게 수치스러운 패배를 주고 역사적인 승리를 이뤄냈다.”

– 현대조선역사

북한은 미국이 한반도 북반부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바라보고 있다.

‘미제의 침략’에 북한이 주동적으로 맞받아쳐나가면서 한반도의 남반부 80% 이상을 ‘해방’시켰지만 북한의 기본 목표는 어디까지나 유엔군, 즉, 미군이 북한을 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선이 압록강 인근까지 펼쳐지면서 유엔군이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는 상황에서 북한군이 유엔군을 격퇴하고 1951년 1월부터 1953년 7월까지 2년 반 동안 38선을 지킨 것 자체를 북한이 ‘승리’라고 바라보고 있다.

2) ‘승리의 비결

북한은 승리의 비결로 우선 김일성 총사령관의 영도를 꼽는다.

김일성 총사령관은 반공격, 전략적 후퇴, 유격전, 유엔군 포위 전술을 비롯해 북한군의 정치의식 함양, 비행기 사냥, 주민생활 보장, 무기마련 등 모든 전략과 전술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런 전략과 전술이 유엔군보다 우세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바라본다.

두 번째는 북한 주민들이 높은 애국적 헌신성과 자기 희생성을 발휘한 것을 꼽는다.

전선과 후방에서 “높은 정치적 자각과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가지고” “모든 애로와 난관을 해치고” 영웅적으로 싸운 군인들과 주민들의 노력이 결국 전쟁승리를 보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했는데 공화국 영웅, 노력영웅이 총 600여명에 달했다.

비행기사냥꾼 활동을 한 이병필, 차호남은 유엔군 비행기 여러 대를 떨어뜨린 것으로 하여 ‘영웅’이 되었다.

세 번째로는 세계 사람들의 국제주의적 지지와 성원을 꼽는다.

중국에서 지원군이 직접 전쟁에 함께 참가해줬던 것을 포함해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기 때문에 승리가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체코 등 사회주의 나라들이 북한의 전쟁고아들을 무료로 키워주기도 했으며 1952년 4월과 7월 소련이 밀가루 5만 톤, 중국은 막대한 수량의 양곡, 의약품 등을 보내주었다.

비인도적인 행위

전쟁 중 유엔군은 폭격 외에도 비인도적인 행위를 많이 진행했다.

대표적인 것은 바로 세균전이었다.

일본인 세균전 부대였던 731부대에 대해 미국은 전범재판에서 책임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대신 세균표본과 기술, 관련문서와 주요 ‘기술자’들을 확보했다.

미군의 보호 아래 1951년 가을 이시이 시로 731부대장이 한반도를 다녀간 이후 북한과 중국 화북지방에서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서 파리와 모기가 산채로 발견되기 시작했고 주민들이 콜레라에 감염되고 페스트에 걸려 죽어갔다.

평안도 안주에서만도 1951년 2월 25일부터 3월 11일까지 50여 명이 페스트에 감염되어 36명이 사망하고, 그밖에 호흡기 탄저병이나 뇌염, 그리고 당시에는 병원균을 판별할 수 없던 각종 급성 전염병에 걸려 발병한 지 불과 2~36시간 만에 사망하는 사례도 보고되었다.

1952년 2월 22일 북한 외무상과 중국의 외교부장은 미국이 감행한 세균전에 반대하는 정식 항의를 제출했다.

미국은 세균전 운운이 단순한 날조에 불과하다고 반박했지만 미국 과학자연맹에서 “미국이 세균병기를 개발해왔고 그 계획을 위한 자금을 계속 증액해 온 것이 사실이다”라고 지적함으로써 세균전을 둘러싼 국제적 공반전이 더욱 세차게 달아올랐다.

이후 스웨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국제조사단이 1952년 6월 23일부터 8월 6일까지 조사한 결과 미군 비행기가 폭격이나 기총소사 없이 조용히 지나간 후 지역에서 콜레라균이나 페스트에 감염된 파리와 모기, 벼룩, 거미, 딱정벌레 등이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었다.

이 벌레들은 재래의 한국 곤충들과 다른 종류의 것이었는데 파리의 경우 한국 파리보다 크고 긴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연구결과에 따라 국제과학조사단은 다음과 같이 최종결론을 내렸다.

본 조사단은 결론으로서 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2차 대전 중에 장티푸스를 퍼뜨리기 위해 사용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동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장티푸스에 감염된 쥐가 비행기로부터 낙하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국제조사단은 유엔군의 세균전 증거를 확보한 것이다.

심지어 유엔군은 한반도 이남지역에서도 세균전을 감행했다.

태백산맥에 걸쳐 유엔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수만 명의 유격대들을 대상으로 추진한 것이다.

이들을 초토화하기 위해 대규모 세균을 살포했고 1만 명 가까이에 달하는 유격대원들이 홍진, 페스트 등에 걸려 사망했다.

당시 세균전은 인근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광주 무등산에 뿌려진 세균으로 민간인 수백 명이 고열과 함께 피부가 검게 변한 채 사망하기도 했다.

유엔군의 세균전은 많은 인명을 앗아갔지만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다음으로 유엔군은 세균전을 확대하기 위해 포로로 잡힌 인민군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진행했다는 의혹도 있다.

현재, 포로로 잡힌 인민군과 중공군을 대상으로 한 유엔군의 생체실험이 원산 앞바다와 거제 앞바다의 미 함정, 그리고 오키나와 기지 등에서 행해졌다는 주장이 있다.

1992년 12월, 거제 제6포로수용소가 있던 용산 마을의 밭에서 큰 병에 담겨 비옷에 쌓여 있는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불란서 파리 세계평화옹호대회 귀중’이라는 제목의 편지(광목 속옷을 찢어 만든 가로 80cm, 세로 120cm 크기)에는 “미군이 인민군 포로를 일렬로 세워놓고 총기의 성능 시험과 세균무기 실험 등의 생체실험을 하고 있다”라는 내용과 함께, 끝 부분에 “세계 평화를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피의 섬 거제도에서 제6수용소 전체 인민군 전쟁포로 일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국의 몰락 후국의 미래”, 황성환 지음. 도서출판 민플러스

NK투데이 편집부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