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정에 ‘외국군대 철수’가 담길 수 있었던 배경

휴전협정에 ‘외국군대 철수’가 담길 수 있었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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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두고 남북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본 자료와 내용은 전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토대로 한 것이며 NK투데이의 입장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휴전협정

‘1950년 12월의 총퇴각’으로 충격을 받은 미국은 12월 14일 유엔 제 5차 총회에서 ‘무조건 즉시 정전’을 제안했다.

전선이 고착화된 조건에서 트루먼 미 대통령은 휴전교섭에 나선 것이다.

휴전회담은 1951년 7월 8일 개성 예비회담에 이어 2일 후인 7월 10일 본회담으로 개최되었다.

휴전회담에서의 주요 쟁점은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포로교환 문제, 휴전실시를 위한 감시기관 구성문제 등이었다.

쟁점이 첨예하게 대치됨에 따라 휴전회담은 무려 2년동안 지속되게 된다.

우선 군사경계선 설정부터 논란을 빚었다.

북한 측은 전쟁 전에 남북을 갈라놓았던 ‘38도선’을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양군의 접촉선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공군이 북방까지 폭격하고 있으므로 접촉선보다 더 북쪽에 휴전선을 설치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자 북한은 유격부대가 덕유산 등지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고 있으니 접촉선을 부산 앞쪽에 잡아야 한다고 반박한다.

결국 4개월간의 논쟁 끝에 1951년 10월 31일 현재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접촉선으로 휴전선이 설정된다.

휴전협상 중 38선에 줄을 긋고 있는 모습

다음으로 비무장지대, 휴전협정 이행 등에 대한 감시기관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비교적 큰 대립없이 합의되었다.

미군이 추천한 스웨덴과 스위스, 북한이 추천한 폴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 등 4개국의 중립국 감시위원회 설치로 결정된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포로교환 문제였다.

제네바 협정(1949년)에 따라 ‘모든 전쟁포로의 자국송환’을 원칙으로 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은 희망자만을 본국으로 송환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북한은 제네바 협정에 따르자고 거듭 주장했으나 유엔군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면서 수만의 북한군이 포로로 잡혀있었던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유엔군은 북한군 포로들에게 귀향 의사를 묻는 ‘전향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 때 북한군의 주장에 따르면 고문, 강압에 의한 강제전향 공작까지 감행되었다고 한다.

포로교환 문제가 장기간 끌게 된 데는 유엔군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무리수를 던진 측면이 컸지만 휴전회담을 파행시키겠다는 미국의 숨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국은 휴전회담을 진행하면서 끊임없이 38선 진격을 노리고 있었다.

유엔군은 휴전회담 기간 ‘아이젠하워 신공세’, ‘하기공세’, ‘추기공세’ 등 많은 공세를 전개했다.

많은 양의 폭탄을 퍼부으면서 북한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공세를 펼쳐왔다.

특히 유엔군은 1211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하루에도 3~4만발의 폭탄과 포탄을 퍼부었다.

1211고지는 전선 동부의 군사요충지였다.

북한 입장에서는 1211고지가 ‘숱한 고지를 잃어버리게 되면 몇십리를 후퇴하게 만드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북한은 갱도(지하굴)를 파서 유엔군의 공중공습을 버텨내고 수많은 군인이 목숨을 걸고 고지를 지켜냈다.

여기서 이수복 등 수많은 북한의 ‘영웅’이 탄생하게 되었다.

결국 유엔군은 이 고지에서 1만 5,800여명의 병력과 수많은 무기장비들을 잃었지만 고지점령에는 실패했다.

최종적으로 유엔군이 공세를 포기하고 휴전을 맺게 된 계기는 1953년 5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있었던 3차에 걸친 북한군의 공격 때문이었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금강산 관문인 351고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유엔군을 밀어내면서 월비산을 비롯해 남강까지 차지했다.

전쟁을 더 진행하게 된다면 유엔군이 오히려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정황이 된 것이다.

따라서 유엔군은 막판 휴전협정에서 북한 측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게 된다.

1953년 7월 27일 미국, 중국, 북한 대표가 모여 맺은 휴전협정에서 북한의 요구에 따라 외국군대 철수와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회의가 규정(제 4조 60항)된 것이다.

또한 휴전 이후 병력 증강 방지 (제2조) 조항도 체결되었다.

이러한 조항들에 따라 1954년 4월 26일 제네바에서 정치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의 16개국, 북한, 중국, 소련 등이 참석해 ‘한반도 통일방식’과 ‘외국군대의 철수’를 논의하게 된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정치회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미국과 한국은 유엔 감시 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한 통일방안을 주장했지만 북한 측은 6개월 이내에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누구의 감시 없이 전 한반도 주민의 자유선거로 정부와 국회를 건설하자고 한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유엔이 한국전쟁 교전자 중 일원으로 한국 문제를 공평하게 처리할 권한과 도의적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유엔 감시 하의 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대했다.

이견 차로 결국 제네바회담은 결렬되고 말았고 통일 방안 논의는 다시 수면 위로 가라앉고 말았다.

훗날 미국은 휴전협정에 명시된 군비축소조항을 파기하겠다고 주장(1957년 6월 21일)하면서 사실상 휴전협상 무력화에 나서게 된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1958년부터 ‘어네스트 존’ 미사일부대, 핵포병대 ‘펜토믹 사단’을 배치하는 등 핵병기를 한국에 배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매년 북한을 대상으로 한 전쟁훈련을 진행하면서 ‘군비축소조항’을 끊임없이 위반해왔다.

NK투데이 편집부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