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전쟁 중 소환된 대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북한은 왜?] 전쟁 중 소환된 대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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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두고 남북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본 자료와 내용은 전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토대로 한 것이며 NK투데이의 입장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주민생활 대책

한편 북한은 주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후방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빠르게 취해나갔다.

1951년 1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가 소집되어 여러 가지 대책을 취했다.

첫 번째 대책은 주민들의 생활안정이었다.

집을 잃은 주민들에게 새로 집을 지어주도록 대책을 세우고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식량과 종곡을 대여해줬으며 현물세 일부와 대여곡 반환을 면제해 주었다.

전재민(전쟁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구호를 위해 전재민구호위원회가 조직되어 식량과 의복이 공급되고 무상치료가 실시되었다.

전재민과 영세농들로 수많은 국가목장이 새로 꾸려지면서 축산업이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1952년 12월에는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가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형편을 개선하기 위해 부업협동조합을 조직할 데에 대한 결정을 채택했다.

부업뿐만 아니라 농사일까지 함께 한 일부 부업협동조합 사례는 전쟁 직후 북한이 농업협동화를 추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51년 1월 내각전원회의에서는 “조국해방전쟁에서 희생된 인민군장병 및 빨치산들과 애국열사들의 유자녀학원설치에 관한 결정서”가 채택되어 각 도 및 중요 도시들에 유자녀보육원과 유자녀학원 및 전쟁고아들을 위한 초등학원이 설치되어 4월 1일부터 일제히 수업을 시작했다.

영예군인들과 부상당한 애국자들을 위해 각 지방에 영예군인학교가 조직되고 영예군인들은 자기 희망에 따라 과학과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각종 시책에 힘입어 농민들은 미군 비행기들의 폭격 속에서도 전선에 나간 군인들을 위해 전시 식량증산에 적극 나섰다.

북한 주민들은 파괴된 철도와 도로, 교량을 복구수리하여 전시수송을 보장했고 포탄과 탄약, 식량 등을 직접 전선에 나르기도 했다.

주민들의 노력으로 전시 상태에서의 생산량은 점차 늘어난 것이다.

1952년 국영 및 협동단체 공업 총생산액은 1951년에 비해 19%가 더 늘었으며 알곡총수확고는 13%가 더 늘었다.

1951년부터 희천, 구성, 덕천 등지에 현대적인 기계공장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군기기금 헌납운동도 벌였는데 1951년 6월 10일 15억원에 달하는 현금, 16만 8,420여 가마니의 양곡을 비롯한 거액의 군기기금을 자원적으로 헌납하고 1951년 10월 5일 조국보위복권이 발행되었고 불과 10일 만에 계획을 1억원 초과한 6억원의 복권이 팔리기도 했다.

두 번째 대책은 교육과 과학연구를 안정적으로 보장한 것이었다.

1951년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북한 지도부는 전쟁 후 복구를 위한 준비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전국적으로 인민학교(소학교)부터 대학까지 다시 문을 열도록 해서 전쟁 중임에도 학생들이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 참가한 대학생들도 다시 소환해서 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일부 대학생들은 소련 등지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전쟁 중에 대학을 다닌 학생들은 훗날 전문적인 지식으로 북한의 복구 건설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후복구 건설을 대비하기 위한 기술자, 과학자 준비사업도 빠르게 진행했다.

김일성 주석은 1952년 4월 과학자대회를 소집해서 전쟁 후 복구건설에서 필요한 과학자들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과학기술 발전을 책임지는 국가과학원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전쟁 중인 1952년 12월 1일 북한의 과학연구를 책임지는 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과학원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도 연구하는 종합연구기관이었다.

과학원이 출범하면서 3개의 부문별 위원회(자연 및 기술과학/의학 및 농학/사회과학)와 8개의 연구소(물리수학/화학/의학/농학/역사/물질문화사/경제법학/조선어·조선문학)로 출발했다.

과학자들은 전쟁의 포화가 퍼부어지는 와중에서도 과학원에서 복구건설을 위한 과학연구를 안정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NK투데이 편집부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