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연기처럼 사라진 북한군

[북한은 왜?] 연기처럼 사라진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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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후퇴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오자 미국에서 대규모 병력이 한반도로 진주하기 시작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때 맥아더 사령관은 9월 15일 인천으로 대병력을 상륙시켜 북한 인민군의 보급로를 끊고 앞뒤에서 협공하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맥아더는 유엔군 10군단과 7연합함대를 꾸려 970여 대의 탱크, 1,800여 대의 비행기, 300여척의 함선이라는 대규모 역량을 집중시켰다.

맥아더의 작전을 사전에 파악한 북한은 빠르게 ‘전략적 후퇴’라는 전술을 수립한다.

무모한 정면대결을 피하고 신속한 후퇴를 통해 역량 소모를 최소한으로 막고 한반도 전체에서 유격전을 벌일 것을 결정한 것이다.

전세가 불리하니 후퇴한다. …… 미군 상륙에 도움이 되는 요소는 모두 제고할 것, 이용할 수 있는 군사시설은 파괴할 것, 산간부락을 접수하고 식량을 비축할 것, 입산경험자 및 활동가능자는 입산시킬 것.
– 김남식, "남로당 연구 1", 돌베개, 1984. 455쪽

이에 따라 낙동강 계선의 북한 주력부대는 재빨리 후퇴를 시작했다.

“남부전선의 북한군이 어떻게 유엔군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났는가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거의 하루밤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 미국 AP통신, 1950.9.27

주력부대의 후퇴를 보장하기 위해 인천, 서울 지구, 38도선, 원산, 양덕 일대 북한군은 유엔군이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는 것을 최대한 지연시켜야 했다.

인천의 관문 월미도에서 북한군 수십 명에 불과한 1개 중대는 불과 4문의 대포로 3일이나 유엔군의 상륙을 지연시켰다.

인천, 서울 지역에서도 13일, 원산에서는 10일 동안 유엔군을 방어했다.

인천지역 북한군과 유엔군 병력을 비교해보면 유엔군 총 병력은 7만 5천여 명에 함정이 261척이었고 북한군은 현지에서 모집된 학생과 민간인으로 구성된 약 2만여 명에 대부분 기관총, 소화기로 무장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각지에서 유엔군을 방어하는 동안 북한군 주력부대는 신속하게 후퇴했다.

후퇴를 보장하기 위해 후비(후방의 수비)부대는 집단방어, 기동방어 등을 통해 유엔군의 부대들을 포위하고 섬멸하는 전투를 끊임없이 벌이기도 했다.

대부분 후퇴를 한 조건에서 호남지역에 고립된 북한군 중 5개 사단은 소백산맥,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몰래 북상했다.

후퇴하지 못한 1만여 명의 북한군은 지리산, 가야산, 소백산 일대의 유격대에 합류했다.

9월 28일 서울시를 완전히 손에 넣은 유엔군은 애초 유엔에서 합의했던 ‘38선 복원’이라는 목표를 무시하고 38선을 돌파하기로 결정한다.

총 44만 5446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북상한 유엔군은 북한군이 전략적으로 한반도 곳곳에 펼쳐진 산맥으로 숨어들어갔기 때문에 빠르게 북한 지역을 점령해나갈 수 있었다.

10월 19일 평양을 함락하고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했다.

이때 유엔군은 북한 전 지역에 대해 무차별 폭격을 가하면서 군사시설 뿐 아니라 학교·공장·주택가·병원 등 민간 시설까지 폭격을 일삼았고 문화재까지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은 북한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미군들은 38선 이북의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면 그 곳 주민들 가운데 집안에 젊은 청년이 없으면 ‘인민군의 가족’이라고 간주하고 무차별 집단 학살했다.

황해도 지역에서만 12만 명이 순식간에 집단학살 당했으며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두 달도 채 안되는 기간에 황해도 신천은 전체 인구의 14만 2,786명의 1/4에 이르는 3만 5,383명의 주민을 학살당했다.

학살의 증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학살 이후 먼저 창고 문을 열자 입구 부분에 어린이들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이 모두 창고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얼어죽은 사람, 굶어 죽은 사람 외에도 불에 타죽은 사람 또한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고통에 못이겨 몸부림 치느라고 손톱이 빠져있거나 닳아져 있었고 몸부림치며 긁어댄 자리마다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숨에 끊어질 때까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는 것을, 그러다가 죽어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카지무라 히데키, ‘한국전쟁’, “한국현대사 연구1”, 224,다음 증언들은 국제민주법률가협회 국제과학조사단이 발표한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민주볍률가협회 조사단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

미군이 주도한 잔인한 학살은 북한 주민들이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미군이 신천군 초리면 월산리에 들어온 바로 그 날에 우말재 씨의 가족에 대해 특별히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미국인들은 증인 우말재 씨의 남편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다. 그들은 방에 있던 노동표창장을 그의 이마에 못질하여 박아 붙이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5살부터 25살까지 이르는 11명의 우말재 가족의 자녀들은 즉석에서 총살되었다.
우말재 씨의 며느리는 미국 장병들이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말릴려고 했다. 미국인들은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무에 비끌어 맨 다음 가슴을 베고 국부에다 막대기를 박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이 범행에는 약 20여명의 미국병정이 참여하였다.

1950년 10월 18일 승산리(황해도 안악) 지방에서 미국장병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주민을 학교 건물 안으로 몰아 넣었다. 강간당하지 않으려고 반항했던 김희실이라는 여성은 마당에서 벌거숭이가 되었다. 체포된 모든 사람들은 이 여성이 고문당하는 것을 바라보도록 강요당했다. 1미터나 되는 긴 곤봉을 그녀의 국부에다 박았다. 그 여성은 즉사하였다. 그 시체는 전신주에 매달리었다. 미국인들이 퇴각할 때까지 그 시체는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이 모든 장면을 미국인들은 사진 찍었다. 다른 10명의 여성들도 차례 차례로 2~3명의 병정들에게 강간당하였다. 그들도 곤봉으로 맞았고 발길로 채였고 다리 사이에 곤봉이 끼워졌다.…… 구타와 강간과 학살은 8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신천군 용진면 상성리에서는 증인 김현춘 씨의 동생인 12세의 소년이 미군이 자기 부모를 때리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때 미군은 이 소년을 구타하고 그의 눈알을 뽑았다.

1950년 10월 25일 사리원 시에서 MP 완장을 찾 한 미군은 김창두라는 사람에게 끔찍한 살인을 감행하였다. 그는 칼을 가지고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희생자의 피부를 째고 산채로 피부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다가 잘 안되니까 그는 희생자를 돌로 때려 죽였다.

해주시에는 미국 병정들은 지방 여맹위원장인 조옥희라는 젊은 여성을 고문하였던 바 이 여성은 증인과 같은 가방에 구금되어 있었다. 조사단원들이 심문한 증인의 진술에 의하면 미군은 그 여성에게 장기간에 걸친 고문을 하였다. 처음에는 그 여성의 눈을 뽑고 얼마 뒤에 그의 코를 베었고 마지막에는 그의 가슴을 베었다.
– 김주환 엮음,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187~188쪽.

왜 미군은 이렇게 북한 주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했을까?

우선 미국이 전반적으로 동남아시아인들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필리핀 성매매 여성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던 ‘고크(gook, 황인종을 멸시하며 부르는 말)’라는 말을 쓰며 우리 민족을 일종의 ‘동물’로 취급했기 때문에 태워죽이거나 생매장하거나 도끼로 찍고 탱크로 깔아죽일 수 있었다.

‘머리에 명중될 때의 기분은 정말로 통쾌했다. 나를 쳐다보는 부상자를 목표로 겨냥해서 방아쇠를 당기면 두개골이 날아가고 눈에서는 눈동자가 뽀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야말로 명사수 아닌가?“ – 한 미군의 증언.
– 미촌수수, ‘한국전쟁’, 미촌수수 외, 김동춘 엮음, “한국현대사연구 1”, 이성과현실사, 1988,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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