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한국전쟁 6일 전 북한이 제안한 평화적 통일방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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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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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북한과 미국, 중국이 정전협정을 맺은 지 65주년이 되는 해이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남·북·미 혹은 남·북·미·중 회담을 통해 종전선언을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결정했다.

이렇게 종전선언을 하게 되면 사실상 한국전쟁은 65년 만에 종식되는 것이다.

세계 최장기간 정전의 시기를 갖고 있었던 한국전쟁, 그러나 이 전쟁에는 미스터리가 많다.

한국전쟁 발발에 대해서도 28개나 되는 주장이 있는 상황이다. (조성오, "우리역사이야기3", 돌베개, 1993, 75쪽.)

한국에서는 그 발발에 초점을 맞춰 한국전쟁을 '6.25전쟁'이라고 불러왔다.

이에 반해 북한은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며 '미제의 침략 기도로부터 북측 지역을 지켜낸 해방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남북은 한국전쟁 발발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북한이 왜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지 그 근거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많은 관심과 구독 부탁드린다.


한국전쟁 6일 전 북한이 제안한 평화적 통일방안이 있다

[북한은 왜] 1950~1953 한국전쟁(The Korean War) ②

 

1. 전쟁 전야

(계속)

2) 온 민족이 평화통일을 위해 단결하다

이제 남북이 힘을 합칠 일만 남은 상태였다.

북한의 평양에서는 미군이 철수하던 때에 맞춰 1949년 6월 25일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71개의 대표 676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새롭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하 조국전선)을 결성하는 대회를 가졌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165~166쪽.)

조국전선은 이승만 및 남한 친일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남북 정당·사회단체들이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결성 직후인 6월 27일 조국전선은 다음과 같은 평화적 통일방안을 전격 발표했다.

1. 조국의 평화적 통일사업을 조선 인민이 자기수중에 장악하고 인민 자신의 힘으로 필히 실천하자.
2.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방해하는 미군은 즉각 철퇴할 것을 요구한다.
3. 비법적 기관인 유엔 한국위원단은 우리 국토에서 즉각 철퇴할 것을 요구한다.
4. 우리들은 남북한의 통일과 통일적 입법기관의 선거를 동시에 실시할 것을 제의한다.
5.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원하는 민주주의 제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의 지도 하에 선거를 실시한다.
6. 조국의 평화적 통일 계획을 토의하기 위한 남북조선의 제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자를 소집하여 이 협의회에서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한다.
7. 입법기관의 선거는 일반적 평등적 비밀투표의 원칙에 의해 실시한다.
8. 선거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다음 대책을 필히 실시한다.
㉠ 민주주의 제 정당 단체 및 그 활동에 대한 탄압을 금지한다.
……
10. 선거지도위원회의 구성과 동시에 남북조선에 현존한 경찰과 보안기관을 선거지도위원회의 직접 관할 하에 둔다. 선거지도위원회는 경찰대 중에서 친일파 및 일본 경찰과 일본 헌병대에 복무한 자들을 제외함과 아울러 제주도의 인민투쟁과 남조선 유격운동 탄압에 참가한 경찰대를 해산시킨다.
11. 총선거의 결과 수립된 최고입법기관은 조선공화국의 헌법을 채택하고 그 헌법에 기준하여 정부를 구성함과 동시에 신정부는 남북조선에 현존하는 정부에서 정권을 접수하고 그 정부는 해산된다.
12. 남북한에 현존하는 군대는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 '조선공화국'에 연합된다. 민주주의 제 정당과 전 인민에 제기하는 우리들의 평화적 조국통일 계획은 이상과 같다.

이 선언서와 함께 조국전선은 1949년 9월 남북 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1949년 6월 29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선언서 1,000여 부를 남한 전체 국회의원, 남한 정당, 사회단체, 언론·출판기관, 교육문화기관, 산업경제기관, 종교단체, 보건·체육·문화단체에 발송했다.

동시에 미 군사고문단, 유엔조선위원단, 유엔사무총장에도 발송(1949.07.02.)해 유엔가입국 정부들에 전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이런 적극적 공세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런 행태는 남북 모두의 염원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1950년 5월 30일에 열린 제2차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은 불과 30석 밖에 당선되지 못했다.

이승만 반대파 30명의 후보들이 체포되고 부정선거가 남발되는 조건이었음에도 이런 선거결과가 나온 것이다.

반면 자주노선과 남북평화협상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인사들이 무려 130여명이 당선되었다. (총 210명 중 과반 이상 확보,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168쪽.)

2대 국회가 피난가있는 모습. 평화통일노선을 지지하는 후보가 210명 중 130명 당선되다. 출처 : 인터넷.

그만큼 평화통일을 바랐던 한국 민중들의 열망이 높았다.

조국전선은 한번 좌절을 겪었지만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7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는 '평화적 조국통일 방책 추진에 관한 호소문'을 또다시 채택했다.

호소문은 1950년 8월 5일~8일 간에 남북조선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해서 통일적 최고입법기관을 창설하고 8.15 해방 5주년 기념일에 서울에서 제1차 회의를 소집할 것을 제의하고 있었다.

또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제조건, 총선거 실시의 절차, 선거를 지도할 중앙지도위원회의 창설을 토의·결정하기 위해 6월 15~17일 간에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협의회를 해주시 또는 개성시에서 소집할 것을 제의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1", 역사비평사, 2011년, 142쪽.)

호소문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원 3명은 300통을 인쇄해 6월 11일 오전 10시 북측 여현역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38도선을 넘은 조국전선 파견원을 즉시 체포·투옥시켰으며 호소문이 남한 정당, 사회단체 등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1950년 6월 1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의 요청으로 조선 최고입법회의와 남조선 국회를 단일한 전 조선적 입법기관으로 연합하는 방법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할 것을 남한 국회에 제의했다.

이에 남북협상파 국회의원들은 과반을 차지한 조건을 활용해 1950년 6월 26일 북측의 요구에 응답하자는 내용을 국회에서 결의할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전날 한국전쟁이 개시되었고 남북협상파 의원들은 그 어떤 노력을 할 수 없었다.

3) 38선 충돌

한국전쟁은 단순히 6월 25일 총 한 방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1948년 남북 모두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38선은 첨예한 군사적 충돌의 격전지였다.

2여 년 동안 양측의 충돌은 무려 874회에 달했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191쪽.)

매일 두 차례 이상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미 국무성의 한 관리는 1950년 4월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버트 시몬스, "한국내전", 열사람, 1988, 141쪽.)

"38도선은 실질적인 전선이다.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 있고 아마 1,2천 명의 전투원이 실제 교전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9년 한 해에만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군사적 공격을 가한 횟수가 1,863건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찰스 암스트롱 지음, 김연철·이정우 옮김, "북조선탄생", 서해문집, 2006년, 370쪽.)

남한군은 변절을 가장하여 북한 경비대를 유혹하면서 5월 7일 의정부 일대에서 그들을 습격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던 중 남한의 한 부대가 '북한으로 수 킬로미터까지' 침투하였으며 '몇 군데의 마을에 폭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북한은 5월 18일에 38선에서 남쪽으로 수 십 킬로 떨어진 백천 근처를 수 개 중대의 경비대가 공격함으로써 응답하였다. (브루스 커밍스 외, 박의경 옮김,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청사, 1987, 182쪽. /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191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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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전투상황이 소규모 부대의 교전 형태로 1949년 6월 내내 계속되었다. 6월에는 남한의 호림부대 소속 게릴라 중대가 북한으로 기습침투를 강행하는 도중에 북한 경비대에 의해 체포되었다.…남한 게릴라 부대는 그 작전 영역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동해안의 원산만 북방을 공격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의 국방장관은 7월 17일에 국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단 하루에 양양과 원산을 완전히 장악하리라고 확신한다'라고 기자단에게 발표하면서, 동해안에 대한 기습을 성공적으로 감행할 수 있는 남한의 능력을 언급하였다." (브루스 커밍스 외, 박의경 옮김,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청사, 1987, 183쪽. /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192쪽.에서 재인용.)

1949년 8월 초에 어부로 가장하고 인천항을 출발한 남한의 해군 선박은 8월 11일에 대동강 어귀의 해안 군사시설을 폭격하였다. 또한 6일 후에 6척의 소해정에 승선한 남한 기동 부대가 북한의 몽금포 군항을 공격하여 북한 선박 1척을 나포하고 4척을 격침시켰던 사건은 실로 심각한 것이었다. 이 공격에서 전직 해군이었던 국방장관의 명령을 직접 받은 남한측 지휘관 이용운은 해군의 지휘계통을 전적으로 무시하였던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 외, 박의경 옮김,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청사, 1987, 184~185쪽. /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 191쪽.에서 재인용.)

38선의 빈번한 충돌은 남북 모두에게 상당한 희생을 안겨주었고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외에도 남한의 133개 군 중에 118개 군에는 유격전구(유격대들이 활동하던 지역)가 꾸려져 남한 전역이 무장항쟁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조성오, "우리역사이야기3", 돌베개, 1993, 76쪽.)

당시의 상황을 민중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고 표현했다.

사실상 전쟁 상황과 다를 바 없는 형국이 펼쳐지고 있었다.

(계속)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