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1947년 미국 기자가 본 김일성 위원장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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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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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한의 공식 국가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1948년 9월 9일에 수립되었다.

그리고 현재 조선노동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영도’하고 있다.

영도라 함은 ‘앞장서서 지도하고 이끎’을 뜻한다. (다음(Daum) 한국어 사전)

그렇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노동당이 세워진 과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어떻게 정당이 국가 전반을 이끌게 되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20. 북한은 선거를 할까? – 북한의 선거, 정치시스템"에서 당의 국가 영도 시스템을 다룰 예정이다.

 

(계속)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까지, 불과 30대 중후반에 불과했던 김일성 수상은 독보적인 지위의 정치지도자로서 인정받고 북한의 각종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그렇다면 김일성 수상은 어떻게 북한 주민들에게 인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을까?

미국 작가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북한, 1947년, 여름"에서 김일성 수상과의 인터뷰를 담았다.

인터뷰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김일성 수상이 어떻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초대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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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들이 첫 번째 선거에서 보여준 헌신과 열정은 다른 오래된 민주국가에서 경험한 것들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내가 만나본 어떤 북한 사람도 자신이 인민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해방조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은 36살인데 남한의 통치자 이승만의 반도 안 되는 나이이다.

그는 남한의 모든 경쟁자보다 오래 살 것 같다.

그것은 그가 그들보다 훨씬 젊을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는 훨씬 뛰어난 투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일성 위원장은 19살부터 시작해 온 생애를 일본인과 투쟁하는 데 바쳤다.

그는 1만 명의 유격대를 조직했고 그 유격대는 30만 이상의 조선인들의 산악정부(hill government, 유격근거지)를 방어했으며, 일본인들을 여러 해 동안 긍지에 몰아넣었다.

나는 평양에 있는 볕이 잘 드는 널찍한 그의 집무실에서 그와 대담했다.

그는 숱이 많은 검은 더벅머리에 조선인들이 여름에 보통 입는 얇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그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김일성 위원장은 애국적인 혁명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일곱 살 때에 있었던 1919년의 봉기(3.1운동)때 감옥에 갔다.

그의 아버지는 석방된 뒤 많은 조선인 애국지사들이 그러했듯이,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만주로 이주했다.

젊은 김일성 위원장은 만주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점점 커지는 일본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선인 학생들을 조직하다가 처벌을 받았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였을 때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였으며 김일성 위원장은 19세였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버지의 권총 두 자루를 주었고 김일성 위원장은 산악지대로 가 조선인 애국단(Korean Patriots' Band, 반일인민유격대)을 조직했다.

80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일본 군대의 무기를 빼앗으며 그의 무리는 1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대항해 싸우고 있던 중국인들의 '만주의용군'(Manchurian Volunteers)과 접촉을 가졌고 조만국경 산악지역의 5개 현에 '조선인 자치정부'(autonomous Korean Government)를 세웠다.

그는 국경을 넘어들다가 일본군 수비대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그는 공작원들을 조선의 도시에 파견하여 '조국광복회'를 조직했다.

그들에게는 10대 강령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조선의 독립, 정치의 민주주의, 토지개혁, 8시간노동 실시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23세 때 김일성 위원장은 이 조국광복회의 회장이자 북부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둔 유격대의 사령관이었다.

이 모든 일들은 10 내지 15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는 미국과 장개석 정부가 여전히 일본을 만주국의 합법적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신문에 '반일악당(anti-emperor bandit) 김일성'이라고 썼다.

그들은 김일성 위원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퍼뜨렸는데, 예를 들면 그가 날 수 있다든가 축지법을 써서 한 장소에서 다른 먼 곳으로 한걸음에 간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일본은 그의 목에 20만 엔의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당시 화폐가치로 10만 달러(1947년 미국)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한 암살자가 조선인 한 명을 살해하여 그 머리를 들고 와서 김일성 위원장의 목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년 뒤 그들은 김일성 위원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인정했다.

일본이 항복한 뒤 처음 몇 주일간 김일성 위원장은 조선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유격대원 중 많은 이들이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 분은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묻곤 했다.

나중에 그 동안 김일성 위원장이 가명을 쓰면서 지방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데 관여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조국땅에 익숙해지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는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평양에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그는 공산당원이었으며, 지금은 공산당의 후신이며 북조선 내의 가장 큰 정당인 북조선노동당의 당원이다.

"북조선 정부는 통일을 위해 통일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그는 내게 말했다.

"남조선 인민들도 이를 열망하고 있소. 그러나 남조선에서 벌어지는 테러, 구속, 살인은 인민의지의 표현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인민당의 지도자 여운형의 암살을 예로 들었다.

여운형은 단명으로 끝난 '조선인민공화국'을 주도했던 이들 중의 일원이었고 미국인들은 그 당시 그를 이용해 그들의 우익 군정 내에서 좌익 쪽 균형을 잡도록 했었는데, 김일성 위원장과 나의 대담 2개월 전에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되었다.

그는 우리의 대담이 있기 6주일 전에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그 모임에 나올 사람들에 대한 체포·구속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에 8월에는 좌익신문의 신문기자들이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단과 회견을 갖고 나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반동분자들과 친일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생겨난 이러한 곤경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통일된 민주정부를 결국에는 수립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선인민의 뜻이니까요."라고 김일성 위원장은 말했다.

 

(끝)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