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비밀투표가 실시된 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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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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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한의 공식 국가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1948년 9월 9일에 수립되었다.

그리고 현재 조선노동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영도’하고 있다.

영도라 함은 ‘앞장서서 지도하고 이끎’을 뜻한다. (다음(Daum) 한국어 사전)

그렇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노동당이 세워진 과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어떻게 정당이 국가 전반을 이끌게 되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20. 북한은 선거를 할까? – 북한의 선거, 정치시스템"에서 당의 국가 영도 시스템을 다룰 예정이다.

 

국가와 당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⑨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과정 

(계속)

① 이북 선거 (김학준, "북한의 역사제2권-미소냉전과 소련군정 아래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064~1065, 1067쪽/ 안문석, "북한현대사산책1", 인물과사상사, 2016년, 274~275쪽에서 거의 인용.)

1947~1948년 인민위원회 선거와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북조선중앙선거위원회가 꾸려졌으며 212개 선거구마다 구 선거위원회가, 8,300여개의 분구선거위원회가 세워졌다.

후보자 추천을 담당했던 것은 북조선 민전이었다.

군 단위의 민전에서는 주민총회를 통해 후보자를 공개적으로 검토했다.

천도교청우당의 세가 강했던 평남 덕천군, 평북 선천군과 정주군, 황해 안악군, 한남 홍원군 등에서는 민전의 후보결정에 이의를 품고 천도교청우당의 독자적인 후보가 출마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15개 선거구는 경선을 치뤘으며 나머지 선거구는 단선으로 진행되었다.

1948년 8월 25일 북한 최초의 대의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북한 발표에 따르면 이북 지역에서 총 유권자 중 99.97%(452만 4,932명)가 투표했다고 한다.

1947년 인민위원회 선거(99.68%)보다 투표율이 더 높았다.

② 이남 선거

그렇다면 이남에서 비밀투표는 시행되었을까?

1948년 7월 24일부터 8월 10일까지 수도경찰청에 비밀투표행위로 검거된 수가 모두 100여명에 이른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배게, 2015년 신판, 170쪽.)

이남의 조병옥 경무부장도 8월 20일 현재 '지하선거'와 관련하여 구속된 자는 1,379명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월간조선, "손세일의 비교 평전 (104) 한국 민족주의의 두 유형 – 이승만과 김구 남북공산주의자들의 도전 속에서", 2012.12.)

이남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선거는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거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우선 선거를 위해서는 선거위원회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단체들(남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남조선 민전)이 주도하여 시·군·구 선거위원회를 꾸렸다.

그 구체적인 집행을 위해 전권위원회도 결성했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배게, 2015년 신판, 166~167쪽.)

총 7만 8천여 명의 전권위원들이 꾸려져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밀투표를 실행해나갔다고 한다.

경상남북도, 전남, 강원 등 대한민국정부의 행정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 전권위원들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 마을회의를 소집해 투표용지를 나눠주고 투표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회의를 열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전권위원들이 직장이나 거리를 돌면서 연판장(여러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을 표명하기 위하여 연명으로 작성한 문서)을 돌리고 서명을 받는 방식으로 투표를 진행했다.

그런 가운데 몇몇 전권위원들은 상당한 정도의 서명투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부산의 조선방직공장 여공인 한 전권위원은 혼자서 1,300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으며 서울 영등포 지구에서는 890명의 서명투표를 받은 전권위원도 있었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배게, 2015년 신판, 170쪽.)

그렇다면 후보들은 어떻게 등록했을까?

후보는 남조선 민전에서 주로 내세운 인물이었다.

1947년 북한에서 진행한 인민위원회 선거와 유사하게 민전에서 추천한 후보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 서명을 받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③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이렇게 하여 비밀투표를 통해 선출된 각 지역 대표들은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 개성과 동두천 등의 월북로를 통해 북한에 집결한다.

월북과정에서 '수십 명'이 체포되기도 했지만 선출된 대표 1,080명 중 1,002명(94.4%)는 38선을 뚫고 황해도 해주에 도착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어학회 회장 이극로,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허헌 등이 있다.

당시 회의에는 제주4.3항쟁을 주도했던 6명의 항쟁주도자, 김달삼(4.3항쟁 총대장)을 비롯해 안세훈,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 문등용이 참가하기도 했다. (제주의 소리, '<김관후의 4·3칼럼> (11)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 총책 김달삼',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36003)

이렇게 하여 8월 21~26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해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남조선노동당 이병남 당원은 이남 전체 유권자 868만 1,746명 가운데 77.48%인 673만 2,407명이 투표에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김학준, "북한의 역사제2권-미소냉전과 소련군정 아래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056쪽.)

이 발표가 사실이라면 이 선거의 투표자수는 5.10단독선거의 투표자보다 65만 명 더 많은 셈이다.

대회에서 대표들은 남북 유권자수 비율에 따라 총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남측 대의원을 선출했다.

3명 중 1명꼴로 남측 대의원을 뽑은 셈이었다.

※ 김달삼 대장은 당시 제주 4.3항쟁을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기도 했다.

김달삼.

"첫째로는 30만 제주도 전체 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의 남조선 분할 식민지 침략정책을 단호히 반대하고 조국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주도 무장구국항쟁은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남조선 전체 인민들의 위대한 구국투쟁의 일환인 까닭입니다. 전국에서 투쟁이 있었기에 적들이 제주도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김달삼의 해주대회 연설문 중에서. (제주의 소리, '<김관후의 4·3칼럼> (11)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 총책 김달삼',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36003)

 

(계속)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