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인민위원회 대표들의 절반은 '무소속'

[북한은 왜?] 인민위원회 대표들의 절반은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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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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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한의 공식 국가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1948년 9월 9일에 수립되었다.

그리고 현재 조선노동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영도’하고 있다.

영도라 함은 ‘앞장서서 지도하고 이끎’을 뜻한다. (다음(Daum) 한국어 사전)

그렇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노동당이 세워진 과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어떻게 정당이 국가 전반을 이끌게 되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20. 북한은 선거를 할까? – 북한의 선거, 정치시스템"에서 당의 국가 영도 시스템을 다룰 예정이다.

(계속)

국가와 당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④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과정 

⑥ 특징 (전현수, ‘1946년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사학연구 제115호", 2014년 9월, 190~197쪽.에서 인용)

38선 이북에서 최초로 진행된 선거의 특징은 우선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무소속의 비율이 50%에 달했다는 것이었다.

민전 후보들이 거의 당선되었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민전이 후보추천과정에서 정당보다는 사회단체 구성원들을 후보로 내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두 번째는 성별구성에서 여성들이 13% 정도에 달했다는 것이다.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은 선거를 이틀 앞두고 진행한 연설에서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지 말자",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여성후보를 출마시키지 말자"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우려를 표명한 바 있었다.

당시 여성들의 투표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민전은 최대한 여성들을 ‘민전후보’로 추천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찬성표’를 던졌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이 당선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해방 직후 가부장제가 강하게 남아있던 조건에서 여성 13%의 비율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세 번째는 농민의 비중이 높았다.

당선자의 30-40%가 농민이었다.

당시 전체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농민이었던 것에 비하면 낮은 비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라고 볼 수 있다.

네 번째는 비율이 높지 않지만 상인, 기업가, 지식인, 종교인 당선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인 145명, 기업가 73명, 지식인 311명, 종교인 94명이 도·시·군 인민위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김일성 위원장을 비롯해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북한을 주도했던 것을 고려할 때 이 같은 결과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 상인, 기업가, 종교인들의 정치참여는 김일성 위원장과 민전이 추구했던 방향이었다.

김일성 위원장은 선거 이틀 전, 일부 사람들의 "승려들과 목사들이 인민위원으로 선거되어서는 안 되며 교인들도 선거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민전 역시 다양한 각계각층의 대표들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후보 추천 원칙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상인, 기업가들도 선거에 출마하고 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섯 번째는 이례적으로 높은 투표율(99.68%)와 민전 후보자에 대한 찬성율(97.06%)이었다.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주민들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정책을 지지하며 사전에 민전의 선거공약을 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보고회, 대담 등의 다양한 선전활동을 진행한 전국 12만 선전원들의 노력과 각 정당·사회단체들의 지지·지원의 결실이기도 했다.

지역 민전이 원활한 소통과 토론으로 주민 누구나 찬성할 수밖에 없는 후보를 세운 것도 컸다.

전현수 경북대 교수는 "(당시) 북조선의 선거제도는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요소가 많다. 인민이 정권을 선거하는 것, 여성이 공직 선거에 출마하는 것, 지식과 재산이 없는 노동자·농민이 공직에 진출한다는 것은 가까운 과거인 조선시대나 일제시대(강점기)에는 감히 상상도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향후 북한의 선거는 모두 이같은 방법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6) 북조선인민회의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출범

대중의 직접선거로 인민위원회가 출범한 후 임시중앙정부 역할을 담당했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당선된 각 급 인민위원회 대표들의 승인과 인정을 다시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하면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중앙기구를 새롭게 꾸릴 결심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북조선인민회의’와 ‘북조선인민위원회’였다.

단순히 중앙기구를 세우는 것을 뛰어넘어 국회, 행정부의 형태를 어느 정도 갖추고자 한 것이다.

북조선인민회의와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절차로 수립되었다.

1947년 2월 17일에서 20일 사이에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당선된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 3명 중 1명씩과 북조선노동당, 민주당, 천도교청우당, 북조선 직업동맹, 농민동맹, 민주청년동맹, 민주여성동맹 대표 각 5명씩을 합한 1,186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 그동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표한 법령 보고, 1947년 인민경제 발전계획 논의가 있었고 북조선 인민회의 창설을 위한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참가자 5명 중 1명의 비율로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 총 237명을 선출했다.

이렇게 대의원이 뽑혔고 북조선인민회의가 출범하게 되었다.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 정당별 분포는 무소속(38%)이 가장 많았고 북조선노동당(36%), 민주당과 청우당(13%) 순이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1", 역사비평사, 2011년, 110쪽.)

직업별로는 농민 26%, 사무원 24%, 노동자 22%, 지식인 15%, 상인 4%, 기업가 3%, 수공업자 2%, 종교인 2%로 농민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모든 국사를 매일 237명이 모여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일종의 ‘국회’와 같은 역할을 가지게 된 북조선인민회의는 행정부 격인 최고집행기관을 꾸리기로 결정했다.

북조선인민회의가 결성된 후 다음날인 2월 21~22일 최고집행기관을 수립하기 위한 북조선 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주권을 북조선인민회의로 이양받는 절차를 거쳤고 다시 최고집행기관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했다.

북조선인민회의와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의 존재가 ‘한시적’이라고 못 박았다.

모스크바삼상회의에 의해 통일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기간을 통일 전, 즉, "통일적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로 둔 것이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1", 역사비평사, 2011년, 110쪽.)

주요한 결정들은 임시최고주권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이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표한 법령을 이행해나갔으며 북조선인민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역할을 수행해나갔다.

(계속)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