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1948년에 지어진 여성전문상담소와 탁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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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에서 성매매를 없앴다고? ⑥ 

–  1946년 남녀평등권 제정과 그 의미 –

5) 모성보호정책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유한 기능인 임신과 출산, 즉 '모성'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전망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아이들이 출산하는 것부터 미래 사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세대의 건강은 여성들의 임신기간, 출산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모성보호는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추구해야 할 가치로 된다.

뿐만 아니라 모성보호는 여성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사회적 조치로 된다.

김일성 위원장은 건국초기 "우리는 여성들에게 정치경제적으로 남성들과 같은 권리를 줄 뿐 아니라 그들이 체질상으로 보아 남자들보다 연약하며 또 모성으로서의 큰 부담을 지고 있는 것만큼 극진히 돌봐주어야 합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원홍,김선욱,김영혜,김동령, "북한여성의 지위에 관한 연구 – 여성관련 법이나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47쪽.)

따라서 해방 후 북한에서는 노동법령(1946.6)을 시작으로 1948년 9월 8일 제정된 인민공화국 헌법 등에 모성보호 정책을 담았다.

우선 노동법령은 제14조-17조에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일한 노동과 기술에 대한 남녀동일임금지불을 규정했고(제7조) 여성노동자는 산전산후 77일의 휴가를 받고(제14조), 임신중인 여자는 가벼운 노동으로 배치전환되며 젖먹이는 시간이 보장되고(제15조․제16조), 임신부와 젖먹이가 있는 여성노동자는 시간외 노동과 야간노동을 금지한다(제17조)고 규정되었다.

1948년 인민공화국 헌법 제22조에는 "여자는 국가 정치․경제․사회․문화생활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남자와 동등하다. 국가는 모성 및 유아를 특별히 보호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김원홍,김선욱,김영혜,김동령, "북한여성의 지위에 관한 연구 – 여성관련 법이나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6쪽.)

한편 해방 후 이북지역에서 여성들에 대한 모성보호사업 중 주목할 것은 1948년 12월 23일 보건성 규칙 제2호로 '여성상담소에 대한 규정'이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김원홍,김선욱,김영혜,김동령, "북한여성의 지위에 관한 연구 – 여성관련 법이나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37쪽.) 

법으로 '평등'이 실현된다고 해서 가부장제, 가정폭력 등 각종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여성들의 삶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여맹이 여성들에게 일일이 법을 해설해주면서 여성들의 여권의식이 높아지고 여맹에 소속된 여성들이 조직생활을 통해 스스로의 권리를 찾을 수 있었지만 개별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경제생활에서 겪는 고통까지 일일이 헤아려주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48년 말 북한은 여성들을 위해 전문 여성상담소를 꾸릴 것을 발표했다.

여성상담소는 오늘날 한국에서 '여성의 전화', '성폭력상담소'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모성보호 정책은 '산원에 관한 규정'(1949)으로 이어진다.

산부인과, 산원에 대한 규칙을 특수하게 제정한 것이다.

그리고 1948년 3월 13일 보건국은 '치료비 규정'을 제정하여 출산비와 3세 미만의 어린이 치료비를 무상으로 바꿨다. (황상익, 김수연, '해방 전후부터 정부 수립까지 (1945-1948년)의 북한 보건의료', "의사학" 제16권 제1호(통권 제30호) 37-70, 2007년 6월, 22쪽.)

6) 육아·가사노동의 사회화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령 "제1조 국가, 경제, 문화, 사회, 정치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들은 남자들과 평등권을 가진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부담해온 육아·가사노동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따라서 해방 후 북한에서는 탁아소·유치원 사업이 빠르게 추진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가 해방 후 2년이 채 안된 1947년 6월 13일 탁아소직제와 탁아소규칙이 발표한 것이다.

당시 김일성 인민위원장은 "우리가 많은 여성들을 사회에 진출시키려면 어린이들을 사회적으로 키우는 대책을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라면서 탁아소, 유치원 건립에 중요 의의를 부여했다. (김원홍,김선욱,김영혜,김동령, "북한여성의 지위에 관한 연구 – 여성관련 법이나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42쪽.)

1949년 발표된 탁아소에 관한 규정에도 "제1조 탁아소는 생후 1개월부터 만3세까지의 유아를 가진 노동여성으로 하여금 노동생산성을 제고시키며 또한 정치, 사회 및 문화생활에 참가할 수 있도록 건전한 유아를 양육시키는데 방조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북한에서 처음 지어진 탁아소는 3.8탁아소였다.

여성의 날(3.8)을 따서 이름을 지은 3.8탁아소는 1948년 2월 15일 모란봉 구역에서 설립되었다.

유치원은 탁아소 건립보다 더 빨랐다.

1946년 1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 133조에 따라 인민학교(초등학교)들에 6살 되는 어린이들을 받아들이는 1년제 유치원반을 병설하는 방법으로 처음 유치원건립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1947년 6월 탁아소규칙과 더불어 독립적인 유치원을 내오자는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49조가 통과된다.

유치원 학제는 3년으로 하여 학교 전 교육교양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해방을 맞은 2년 후 1947년 전국적으로 102개의 유치원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49년 2월 정부 보건성이 꾸려진 후 가장 처음 발표한 규칙이 바로 '탁아소(생후 1개월~만3세)에 관한 규정', '유아원(만4세 이상)에 관한 규정'이었다.

규정에는 유희실, 목욕실 등 꼭 필요한 시설과 최소규모(제7조), 각반의 유아 수(제10조), 최소양육시간(주 10시간, 제18조), 탁아소 소장 자격(제23조), 위생 및 보건대책(제10조~제17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목할 부분은 유아가 병에 걸리게 되면 요양반을 꾸려야 하며 탁아소에서 영양물을 마련해서 각 가정에 제공해야 한다는 것도 규정한 것이다.

보건성의 책임 하에 탁아소·유아원이 확대되었고 전국적으로 620명의 아기들이 12개의 탁아소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116개의 유아원에 8천 656명의 유아들이 다니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많은 여성들의 육아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 역시 또래들과의 집단생활 속에서 체계적인 유아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한편 1948년 12월에는 '유아상담소에 관한 규정'이 통과되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데 나서는 어려움을 전문적으로 상담해주는 기관도 건설된 것이다.

북한은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어린이보육강령'을 채택했다.

그 후 현재까지 모든 아이들의 보육사업을 모두 탁아소·유치원에서 무상으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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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방 후 38선 이북지역에서 여성들의 삶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38선 이북지역 모든 여성들이 당장 탁아소·유치원에 아이를 맡기고 경제생활을 하는 삶을 살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해방은 분명 북한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후 북한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북한은 왜] 시리즈 "16. 탁아소가 없으면 공장 개업이 불가능하다고?"를 통해 북한 여성들의 삶을 좀 더 살펴볼 예정이다.

(끝)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