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할매, 할배들이 우리 말을 읽는 순간.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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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할매, 할배들이 우리 말을 읽는 순간.

– 해방 후 북한의 교육사업 –

국민의 몇 퍼센트가 글을 읽을 수 있는가는 한 국가의 문명화 지표이다.

지난 2013년 유네스코는 전 세계적으로 7억 7,400만 명이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고 있다는 통계치를 발표한 바 있다.

영국 BBC 역시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1,600만 명, 즉 성인 인구의 약 8%가 문맹이라는 보도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http://mn.kbs.co.kr/news/view.do?ncd=3580414)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2012년 10월 8일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더 월드 팩트북(THE WORLD FACTBOOK)'에 따르면 북한의 '문자해독률(Literacy : 15세 이상 인구 중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인구)'는 1991년 기준으로 99%(남성 99%, 여성 99%)였다.

현재 한국에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형편 탓에 한글을 배우지 못한 노인들이 수십 만 명 존재한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상당히 놀라운 통계자료라고 볼 수 있다. (연합뉴스, "북한 문맹률이 0%에 가까운 까닭은", 2012/10/08, "2008년 국립국어원의 '국민 기초 문해력' 조사 결과, 문장 이해능력이 거의 없는 19세 이상 한국인 인구가 전체의 7%인 약 26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2000년대 남한에 정착한 한 탈북자는 "북한에 있을 때 글을 못 읽거나 못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 중에서도 문맹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해방 후 4년 만에 문자해독률은 99%에 달했다고 한다.

즉, 1949년 38선 이북지역 성인들 모두가 우리말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일본말을 썼던 일제 강점기 후 4년 만에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번 글에서는 북한의 문맹퇴치사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볼 예정이다.

아울러 해방 후 북한에서 진행된 교육사업 전반도 함께 다뤄보고자 한다.

<목차> 

1. 문맹퇴치사업
 1) 중요성
 2) 국가적 차원으로 진행된 문맹퇴치사업
 3) 대중이 스스로 나서게 한 문맹퇴치 사업

2.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교육사업
 1) 교원 마련
 2) 기숙사·장학금·월사금 지원
 3) 교과서, 학용품 지원

3. 대학교육

4.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


(계속)

문맹퇴치사업을 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우선 학교부터 신설했다.

문맹퇴치 학교는 한글학교, 2년제 성인학교, 3년제 성인중학교로 구성되었다.

한글학교는 4개월 동안 한글과 기본 산수를 가르쳤으며, 2년제 성인학교는 인민학교(초등학교) 내용을 3년제 성인중학교는 초급중학교 내용을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꾸려진 총 학교 수는 한글학교 19만 여개, 성인학교 1천 491개(1948년도), 성인중학교 161개에 달했다.

다음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진행한 것은 선생님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교원양성을 위해 사범전문학교를 비롯해 단기 교원양성소를 세웠다.
1946년 여름부터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교육방침, 교수교양방법 등을 알려주는 전국 단위의 교원 강습이 조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만 개에 달하는 한글학교의 교원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각 정당, 사회단체, 문화단체의 간부, 일반 학교 교원, 학생들이 모두 한글학교 선생님으로 나섰다.

이들은 문맹자들을 설득해 한글학교 교실로 안내하는 책임도 수행했다.

문맹퇴치 사업을 위한 재정 지원도 적극 이루어졌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꾸려진 후 첫 번째로 다뤄진 안건이 바로 연필생산문제였다.

문맹퇴치 사업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결정 제113호에 따라 모두 무상으로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1946년 국가 예산에서 교육비의 비중은 17퍼센트에 이를 정도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여성들이 아이들을 돌보느라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조건을 고려하여 교육시간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간이탁아소를 세워주기도 했다.

문맹퇴치사업의 추진으로 1946년 12월부터 3월, 동계집중기간 4개월 만에 49만 2,122명의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성과를 계승해 농번기 기간까지 사업을 전개해 1949년 3월까지 총 7기에 걸쳐 문맹퇴치사업이 전개되었다.

그렇게 되어 농사일이 바쁜 1947년 4월부터 7월 말 기간에도 약 90,000여명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며 수확기에 돌입한 1947년 8월부터 11월 말에도 259,375명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3) 대중이 스스로 나서게 한 문맹퇴치 사업

문맹퇴치에 나서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일반 사회와 가정의 열성 부족 문제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적극적 사업 추진에 모든 주민들이 호응을 해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나 같은 무식쟁이야 글은 배워서 무엇하랴", "이 나이에 글은 배워서 무엇하랴" 등의 인식이 있었고 문맹자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여성들의 참여율이 저조했다.

여성들의 참여율 저조는 당시까지 잔존하고 있었던 봉건적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맹이었던 여성들은 남편이나 다른 남성들 앞에서 글을 배우는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성들 또한 여성들이 글을 배우러 다니면 가정생활을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글을 배우지 못하게 막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문맹퇴치사업의 선결과제인 여성문맹퇴치사업을 위해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직접 나서게 된다.

1947년 8월 4일 김일성 위원장은 강원도 평강군 서면 옥동리에 사는 여성농민 리계산을 만나는 가운데 그녀가 문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 여성에게 한글학교에 들어가 문맹을 퇴치하고 석 달 후에 그 결과를 자필로 편지를 써 보낼 것을 제안하였다.

이계산 여성은 약속대로 석 달 후 자필로 편지를 직접 써서 보내게 된다.

이에 감동을 받은 김일성 위원장은 그 사연을 북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1947년 11월 20일 이계산 여성이 살았던 옥동리에서는 평강군문맹자열성자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 평강군 농민들은 문맹퇴치운동에 적극 나설 것을 전국에 호소하게 된다.

그러면서 리계산 여성의 문맹퇴치사례는 이후 북한에서 '리계산운동'으로 정식화되었다.

문맹퇴치사업이 일종의 '군중운동'의 형태로 확대된 것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 전역에 걸쳐 '문맹자 없는 군 면 리 창설운동'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먼저 문맹을 퇴치한 사람이 문맹자를 책임지고 퇴치하는 1인 책임제가 추진되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의 조직인 조선직업총동맹, 청년들의 조직인 북조선민주청년동맹 등 대중단체들도 문맹퇴치사업에 열정적으로 나섰다.

북조선민주청년동맹은 겨울 휴가 중인 학생들의 한글학교 교원 참가를 이끌어내는 사업을 열성적으로 진행했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도 1947년 12월 방학 기간 동안 한글학교 성인학교 교원으로 일하면서 50,580여 명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증설된 학교의 강사 9,500여 명을 양성하기도 했다.

강원도 인제군 자료에 따르면 북조선민주여성동맹 인제군위원회에서는 여성문맹자를 퇴치하기 위하여 자체로 검열반을 조직했으며 면과 면, 마을과 마을사이의 상호 경쟁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대중들의 노력으로 38선 이북 지역에서 문맹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49년 3월 북한 정부는 공식적으로 38선 이북지역에서 문맹을 완전히 퇴치했다고 선포했다.

불과 3년 전인 1946년 2월 성인인구의 절반이 문맹자였던 것에 비하면 괄목한 성과를 이룬 것이다.

북한의 문맹퇴치 사업에서 주목할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문맹퇴치사업이 무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중앙정부), 지역 인민위원회들이 조국이 해방된 직후 어려운 시기에 문맹퇴치, 즉, 교육사업에 과감한 투자를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무상으로 한글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대중 스스로 주인답게 나설 수 있는 '대중운동'의 형태로 문맹퇴치사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직업총동맹(노동자단체),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북조선민주청년동맹 등 각종 대중단체들이 문맹퇴치사업에 책임적으로 나서고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적극적 활동으로 문맹퇴치사업이 빠른 시일 내에 진행될 수 있었다.

세번째로는 당시 여성들의 참여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일제 통계자료에 따르면 1930년대 여성의 문맹률은 92.1%로 당시 거의 모든 여성들은 한글을 읽고 쓸 수 없었다.

따라서 여성들의 문맹을 퇴치하는 것이 문맹퇴치사업의 관건적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의 문맹퇴치사업을 추동했으며 지역에서 여성들의 한글학교 참가를 위해 간이탁아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넷째로는 문맹퇴치사업이 매우 빠른 시일 내에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한글 자체가 배우기 쉽다는 특성이 있었지만 불과 3여 년 만에 천만 여명 성인들의 문맹을 모두 퇴치한 것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계속)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