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통일되면 북한에서 내 조상의 땅을 찾아올 수 있을까? ②

Print Friendly, PDF & Email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통일되면 북한에서 내 조상의 땅을 찾아올 수 있을까?

– 단 26일 만에 진행된 토지개혁

 

토지는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자원 중 하나이다.

따라서 토지를 누가, 어느 계급이 소유하느냐는 사회제도의 규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류는 태초에 '자연의 것'이었던 땅을 '사유화'하기 시작하면서 계급사회를 잉태했다.

인류 역사상 기록된 수많은 전쟁 역시 대부분 땅을 빼앗고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 북한은 모든 토지가 공공 소유로 되어 있다.

북한 헌법 제 20조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제 21조 나라의 모든 자연부원, 철도, 항공운수, 체신기관과 중요공장, 기업소, 항만, 은행은 국가만이 소유한다", "제 22조 토지, 농기계, 배, 중소공장, 기업소 같은 것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어 토지의 사적 소유를 용인하지 않고 있다.

특히 자연자원 중 산과 강은 국가만 소유하고 토지는 국가뿐 아니라 사회협동단체 소유가 가능하다고 명시한다.

북한은 추가로 제 22조에 "사회협동단체소유는 해당 단체에 들어있는 근로자들의 집단적 소유이다."고 명시해두어 사회협동단체 소유권에 대한 해설도 뒀다.

북한에서의 사회협동단체는 한국의 협동조합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인다.

협동조합은 법적으로 조합원 전체가 회사의 소유권을 가진다.

북한의 사회협동단체 역시 단체원들이 그 재산을 집단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수천년동안 왕, 일본 총독부, 지주, 농민들의 사적 소유물이었던 땅을 어떻게 국가 혹은 협동조합 소유로 바꿀 수 있었을까?

이것은 1946년 시행된 토지개혁과 1950년대 후반에 완료된 협동농장화를 통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1946년 토지개혁으로 토지의 균등분배를 이뤄냈으며 1959년까지 전 토지를 협동농장 소유로 바꿔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구체적으로 어땠을까?

이번 글에서는 1946년 시행된 토지개혁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1. 일제 강점기 당시 농민들의 처지
2. 토지개혁의 시작
3. 토지개혁의 구체적 실현
4. 토지개혁의 특징
5. 토지개혁의 결과
6. 통일 되면 북한에서 내 조상의 땅을 찾아올 수 있을까?


(계속)

2. 토지개혁의 시작

1) 북한의 현황

해방 이후 전체 조선인구의 70%는 농민이었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1945~1961)", 선인, 2005년, 122쪽. )

일제 강점기 지주의 수탈에 일제의 수탈까지 감당해야 했던 농민들은 해방이 되자 '밭갈이 할 땅'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아래 내용은 안문석, "북한현대사산책1", 인물과사상사, 2016년, 111쪽에서 거의 인용.)

당시 38선 이북 지역에서 전체 농민 가구의 3.4%인 3만 3,217명의 대지주가 전체 농지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황해도는 1942년 당시 200정보(60만평, 약 여의도의 2/3) 이상의 땅을 가진 지주가 44명, 100~200정보(30만평~60만평) 이상 가진 지주가 76명, 50~100정보 이상을 가진 지주가 267명에 달해 전국적으로 대지주가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였다.

38선 이북지역 농민가구는 모두 100만 4,000가구였는데, 그 중 44만 가구는 토지가 없었고 26만 가구는 영세규모였다.

소작농들은 수확량의 50~90%까지 소작료로 내고 있었다.

사실상 90%를 소작료로 내는 경우는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땅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농민들의 요구가 각 지역 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로 제기되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스스로 뭉쳐 직접 지주를 몰아내고 토지를 분배하기도 했다.

2) 3·7제

토지문제에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독립운동에 떨쳐나섰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38선 이북지역에서는 1945년 9월 25일 조선공산당 평남(평안남도)지구확대위원회가 "정치노선에 관하야(관하여)"를 채택하고 소작료 3‧7제를 제안했다.

해방된 후 첫 수확물에 대해 지주에게 소작료를 30%만 주자는 것으로 당시 농민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어 38선 이북지역 사회주의자들은 서북5도(38선 이북지역) 대표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해 소작물의 30%만을 지주에게 주자는 "토지문제 결정서"를 채택하게 된다.

조선공산당의 결정사항은 곧 농민들에게 확대되었다.

이날 펑안남도민들의 자치치구였던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역시 '소작료 3·7제에 관한 규정'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 있었던 조만식 등 일부는 3·7제가 지주에게 지나치게 불리하다고 반대했지만, 해방을 맞이한 농민들의 요구가 높고 사회주의자들의 요구 또한 강해 3·7제로 결론이 났다.

이로서 해방 후 첫 가을, 38선 이북의 전체 농민들은 기존 관례에서 벗어나 수확한 농산물의 30%만을 지주에게 내게 되었다.

1945년 12월 8~10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 보고자료에 따르면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에 의해 지방인민위원회가 불법화되면서 소작료 3·7제 실시는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북지역에서는 지주의 반발에도 3‧7제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일부지역에서는 농민의 토지 소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아래 내용은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1945~1961)", 선인, 2005년, 125쪽~129쪽에서 거의 인용.)

당시 대회에 참석한 함경남도 대표는 "토지의 분배문제" 검토를 제기했으며 평안남도 대표 역시 농민의 토지에 대한 요구가 강해서 대책에 고심중이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38선 이북의 지역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토지의 경우에는 인민위원회나 농민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이미 몰수한 상태이기도 했다.

3) 토지개혁의 추진

그렇다면 3.7제 이후 토지개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3.7제 투쟁을 통해 농민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조직화되면서 농지개혁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91쪽에 나온 자료를 거의 인용. )

이런 상황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1월 말부터 토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토지개혁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에서 초청한 박문규 토지전문가와 최용달 법학자, 김광진 사회경제학자와 안길, 김책 등 조선인민혁명군 출신 독립운동가들 등이 참여하는 토지개혁법령 작성위원회가 조직된 것이다.

법령 작성위원회가 조직된 뒤 김일성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비롯한 위원들이 몇 차례나 농촌을 돌아보고 농민들과 좌담회를 개최하는 등 현장조사를 거쳤다.

임영태의 "북한 50년사①"에 따르면 토지개혁에 대한 김일성 책임비서의 열의가 대단했다고 한다.

…… 한 달 이상이나 농민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과 담화하고 의논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대중 속에 들어가서 토의하였기 때문에 이런 토지는 이렇게 처리하고 저런 토지는 저렇게 처리하면 될 것이고 땅은 어느 정도의 것을 몰수하면 될 것이라는 등 모든 문제에 대해 정확한 방침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토지개혁을 하는 데서 농민대중의 혁명적 열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며 복잡하고 어려운 첫 민주개혁을 승리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김근식, "북한의 '혁명적 군중노선'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41쪽. )

1946년 2월 38선 이북 지역의 인민위원회들의 연합기구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된 후 토지개혁 사업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를 추동한 것이 바로 농민들의 토지개혁 청원운동이었다. (아래 내용은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1945~1961)", 선인, 2005년, 332~333쪽, 337쪽에서 거의 인용.)

2월 25일자 "정로"지에 따르면 2월 18일 개최된 펑안남도 성천군 농민대회, 순천군 농민대회, 강동군 농민대회에서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국유화하고 무상분배하라는 요구를 제시했다.

물론 일부에서는 당장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주장도 있었다.

"조선노동당역사교재" 160쪽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공산당의 역량이 아직 충분히 강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주저하였다.…그들은 근로대중 속에서 우리 당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 강화되고 있고, 또한 농민들의 혁명적 기세가 높아가고 있는 사실을 옳게 타산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바램으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토지개혁이 바로 실시되었다.

(계속)

[북한은 왜?] 통일되면 북한에서 내 조상의 땅을 찾아올 수 있을까?

http://nktoday.kr/?p=15448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