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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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편보기 : <북한은 왜?> http://nktoday.kr/?p=15265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계속)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1운동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자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서서히 일제에 협력해나갔다.

이광수, 최남선 등 문학가들은 과감하게 친일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들이 일제와 협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패배주의와 무력감 때문이었다.

강대한 일제에 맞서서 싸우기에는 우리 민족의 의식과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내선일체가 되어'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일까.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일본어, 일본이름, 일본식 문화를 강요하고 조선역사 대신 천황 중심의 일본역사를 가르쳤다.

나이어린 조선 소녀들을 위안부로 동원하고 구속된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까지 저지르는 만행을 벌였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우리 민족을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일제와의 투쟁에서 무력감을 느낀 일부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내선일체' 주장에 동조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다수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엔 독립에 대한 염원과 그 의지가 남아있었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만도 수만이 참가하는 노동자, 농민, 학생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면서 우리 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1929년 원산총파업은 3개월이나 원산 노동자 전체가 파업에 참가해 세계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1) 독립운동노선

당시 독립운동은 외세에 의존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노선(이승만 등),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을 이뤄내자는 노선(안창호 등), 일제 치하에서도 민족자치가 가능하다는 노선(이광수 등), 노동자, 농민의 과격한 계급투쟁을 앞세우는 노선(박헌영, 김찬 등), 암살, 파괴 등의 테러를 통한 독립노선(김구, 김원봉 등)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반면 1920년대 중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타도제국주의동맹(약칭 ㅌ.ㄷ, 훗날 반제청년동맹으로 발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성원 등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기치 아래 전체 조선인들을 떨쳐나서야 조국광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훗날 북한 정부의 지도부로 성장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외세의존, 실력양성, 민족자치 노선들이 민족의 힘을 믿지 못하고 일제에 대한 환상에 빠져 만들어진 이론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이 이론들이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독립을 이뤄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독립운동가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조짐을 보이자 '일본의 조선 병합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문제가 아니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은 없다'라며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사례 등을 꼽았다. (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1쪽.)

그들은 일제 및 열강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오직 우리 민족의 힘으로 독립을 이뤄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제시한 노선이 바로 무장에 기반한 전민항쟁노선이었다.

2) 전민항쟁노선

전민항쟁노선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기치 아래 전체 우리민족을 단결시키고 발동하여 항쟁을 벌여나가자는 노선이었다.

즉,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반대하는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고 하나의 독립운동조직에 묶어서 즉각적이며 조직적인 전국 반일항전을 전개하여 조국광복을 실현하자는 노선이었다.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일제의 가혹한 압박에 신음하는 전체 조선인들의 힘을 길러 무장으로 일제를 몰아내는 것밖에 독립의 길은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만주지역에서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키워내고 반일투쟁에 이해관계를 가진 모든 애국역량을 총발동하여 국내에서 거족적인 항쟁을 이뤄나가야 한다고 바라봤다.

그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의병들의 활동, 청산리·봉오동전투에서 보여줬던 우리 민족의 투지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3) 역사 속 전민항쟁 경험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항일무장투쟁계열이 이런 노선을 제기한 이유는 우선 과거 항쟁들의 경험이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폭발된 전민항쟁의 형태를 띠었고 실제 일제의 통치방식을 바꿀 정도로 위력적인 투쟁이었다.

비록 당장의 독립을 이뤄내지 못했지만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났던 6.10만세운동 역시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6.10만세운동. 흰 옷을 입고 순종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죽자 전국적으로 망곡, 봉도, 철시, 동맹휴학 등이 거세게 일어났다. (망곡 : 먼 곳에서 임금이나 어버이의 상사를 당했을 때에, 곡을 할 장소에 몸소 가지 못하고 그쪽을 향하여 슬피 욺. 봉도 : 임금이 거둥할 때 수레를 편안히 모시라고 별감이 소리를 지르면서 경계하던 일. 철시 : 국상이 났거나 대신이 죽었을 때 저자의 문을 닫고 쉬던 일.)

이리, 김천, 청주, 강릉, 강경, 광주 등 주요 읍내가 전부 철시를 하고 전국적으로 봉도식이 진행되었으며, 언론에 보도된 것만 토대해도 김제 금구보통학교, 홍성보통학교, 여산보통학교, 원주보통학교 등 수십 개의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진행되었다. (장석흥, "6.10만세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38~263쪽.)

그리고 1926년 6월 10일 서울에서 학생들 중심으로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의 구호로 시위가 벌어졌으며 시위는 인천, 고창 등지로 확대되었다.

당시 조선공산당, 천도교, 임시상해부 등은 6.10만세운동을 전국에 확대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210여명의 학생들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1,000여 명을 사전 검거하면서 시위는 확산되지 못했다.

비록 6.10만세운동이 지도부의 사전 체포로 큰 항쟁으로 되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이 사상의 차이를 넘어 단합이 가능하다는 것, 전국적 항쟁이 가능하다는 것, 우리민족의 반일 의지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동맹휴학 투쟁으로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1920~1925년(6년) 총 234회, 1926~1928년(3년) 총 210회의 동맹휴학이 발생하는 등 반일학생운동의 기세가 높아지던 시점에 일어난 항쟁이었다.

1929년 11월부터 1930년 4월까지 6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194개교에서 6만 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동맹휴학 등에 참가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 청년학생들의 반일의식과 단결력이 대단히 높아 항쟁의 기운이 전체 민족으로 확산만 되면 전민항쟁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믿은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전민항쟁이 항일무장세력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대중투쟁만으로는 해방을 이뤄낼 수 없다는 교훈이 바로 3·1운동, 6.10만세시위 등에 있다는 것이었다.

총칼로 무장한 일제가 조선을 가혹하게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비폭력·평화운동은 역량의 손실만 가져올 뿐이었다.

그들은 1900년대 의병운동처럼 만주지역에서 성장한 항일군대가 국내에서 직접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무장력이 전민항쟁과 결합하여 단숨에 한반도 땅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군대가 서서히 한반도 땅을 점령하면서 해방을 이루는 형태는 조선땅, 일본본토에서 일본군의 증강을 불러올 위험이 컸다.

따라서 전국 독립운동조직에 묶인 조선인들이 각자 자기 지역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동시에 이루어내는 형태로 추진되어야 했다.

이렇게 항일군대과 전체 조선인들의 신뢰와 연대 속에서 해방을 이루자고 했던 것이 바로 전민항쟁 노선이었다.

실제 항일군대와 민중이 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운 경험은 우리 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동만주 지역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의병운동과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로 대표되는 독립군의 활동으로 우리나라 북부국경지대, 동만주지역에는 역사적으로 반일의식이 높은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1930년대 초 동만주에는 일본의 통치나 만주국(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유격구(일종의 해방구)가 꾸려지기 시작했다.

유격구에서는 토지개혁, 8시간 노동제, 남녀평등,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을 실현하는 인민혁명정부가 건설되었다.

소왕청 유격근거지 기념비. 인민혁명정부가 꾸려졌다고 쓰여져 있다. ⓒ이창기

아이들은 아동단, 여성들은 반일부녀회, 농민들은 농민협회 등의 대중단체에 묶여 반일의식을 높여 나갔다.

인민혁명정부를 중심으로 결합된 주민들은 자체의 힘과 의지로 일본군과 위만군(만주국의 군대)로부터 유격구를 수 년 동안 지켜냈다.

유격구를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은 유격구가 꾸린 군대에서도 나왔다.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대를 유격구의 군대라 하여 유격대라 불렀다.

유격대는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여 총 등의 무기와 식량, 의복 등을 얻었다.

이에 일제는 유격구의 확대에 위기감을 느끼고 1932년 겨울부터 많은 병력을 규합해 해방구에 대한 지속적인 토벌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해방구를 지켜낸 경험들은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들이었던 것이다.

1933년 봄 일제는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의 주재지인 소왕청에 수천여명의 전투병력을 투입하여 대규모 공세를 전개했다.

유격대는 주민들과 함께 1933년 3월 30일 하루 종일 치열한 격전을 치른 끝에 3백여명의 적군을 살상하고 보총·권총 259정과 박격포 4문 등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종석, "북한 지도층과 1930·40년대 초반 동북인민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

그러나 그해 가을 일제는 또다시 보병, 포병, 항공대의 협동 하에 대병력을 밀어붙였다.

비행기까지 동원한 최신무기로 초토화전술을 써가며 왕청, 연길, 화룡, 훈춘현에 각각 수천 명의 병력으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50쪽.)

당시 소왕청은 120여명에 달하는 2개 중대 유격대 역량만 있었다고 한다. (당시 소대규모는 20여명, 중대규모는 60여명, 대대규모는 120여명, 연대규모는 360여명로 추정된다.)

백여명의 사람들이 총을 들고 수천명의 적들과 싸운다는 것은 사실상 무모한 행동이었다.

이 때 소왕청 방어를 위해 나섰던 이들은 유격구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이 아동단, 부녀회, 농민협회 등에 소속되어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아이들은 돌과 통나무를 굴려 적들을 살상하고 기마대와 군용트럭에 타격을 입혔다.

소왕청 전투를 벌였던 뽀쪽산. 여기서 아이들이 돌을 굴려서 일본 토벌대의 공격을 막아냈다고 한다. ⓒ이창기

여성들과 아이들은 밤에 일본 토벌대 숙영지에 들어가 꽹과리나 북을 쳐 일본군들이 밤에 잠을 못 자게 했다.

당조직과 혁명정부의 두리에 뭉친 군민들은 근거지방어전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후방을 지켜선 여성들은 불비 속을 헤치면서 물과 밥을 유격대에 날라갔고 의복도 빨아 주었으며 아동단원들은 근거지를 지켜선 유격대원들에게 항일가요를 불러 그들의 투지를 고무하여 주었다. 인민들로 조직된 반일자위대는 유격대를 도와 후방을 지켜선 한편 적극적으로 출격하였다. 이리하여 1933년 춘기대토벌과 1933년 동기대토벌에서 각각 400여 명, 1,000여명의 살상자를 낸 일제는 부득이 물러가고 말았다. 반일자위대는 근거지방어전에서 무비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백년사화" 제2집, 료녕인민출판사, 1982. 300쪽. /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51쪽에서 재인용.)

이렇게 전체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전투를 벌였다.

당시 주민들의 힘으로 사흘간에 400여명의 토벌대를 소멸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일제토벌대가 녹아난 소왕청골 뾰족산" )

유격대는 일제의 초토화 작전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군의 병영을 몰래 지나 적의 배후를 쳤다.

배후공격에 당황한 일본 토벌대는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주민들과 독립군대가 합세하여 일제의 침략을 몰아낸 소왕청 전투를 통해 전민항쟁의 가능성을 봤다.

항일의식이 높은 주민들과 무장한 군대가 있다면 전민항쟁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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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