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마시대 특집] 천리마시대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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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마 특집 기사 소개 :  http://nktoday.kr/?p=15074

 

만리마운동의 전신은 천리마운동이다.

따라서 북한이 규정한 만리마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리마운동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만리마 포스터. 천리마 포스터와 유사하다.

천리마운동은 1956년 12월 "사회주의건설에서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킬 데 대하여"라는 김일성 주석의 제안으로 시작된 운동이다.

당시 온 사회가 '천리마를 타자'는 구호도 들끓었을 정도로 천리마운동은 북한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천리마운동에 의한 급속한 경제성장은 세계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만리마운동이 천리마운동을 본딴 것인 만큼 천리마운동의 배경, 전개과정, 의미, 그 결과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오늘날 만리마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3차례 연재기사를 통해 북한 천리마운동을 집중분석해보고자 한다.

['만리마시대' 특집] 만리마운동의 전신은 '천리마운동' 
  ① 천리마운동의 배경과 성과  http://nktoday.kr/?p=15149
  ② 천리마 시대의 영웅들 
  ③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편

(계속)

천리마시대의 '영웅들'

그렇다면 천리마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물질적 이익)을 매개로 노동의욕을 높이지만, 기본생활조건을 모두 보장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 의욕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애국심, 도덕적 양심, 긍지와 자부심을 통해 주민들의 노동의욕을 높인다.

1. 천리마운동의 영웅들

북한은 천리마운동이 '대중의 열정, 높은 창의성, 그리고 헌신성을 이끌어낸 운동'이었다고 설명한다.

천리마운동이 주민들의 교양사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책상머리에서 실무적으로 처리하는 사업방법이 아닌 '사람과의 사업'을 중시하는 방법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천리마운동이 진행되면서 북한에서는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했다.

북한 정부는 목표를 초과 달성한 사람에게는 천리마 기수, 성과를 낸 집단이나 조직에는 천리마작업반이라는 명칭을 부여했고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들에게는 '영웅' 호칭을 주었다.

천리마선구자대회 참가한 '영웅들' Youtube 캡처.

임영태의 [북한50년사1]에 따르면 1957년부터 1959년 9월 말까지 66명의 노력영웅이 탄생했으며 2만4천여명이 각종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이 되었는데, 383명의 대의원 중 노동자 출신의 공화국영웅 및 노력영웅, 공훈광부, 천리마작업반장(102명)의 비율이 27%에 달하기도 했다.

천리마운동의 영웅 중 대표적인 인물로 이화순이 있다.

김일성 주석은 이 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기도 했다.

"이화순 동무는…72대의 방직기를 혼자서 다루는 세계적 기록을 창조하였습니다. 이 기대들을 다루기 위하여 그는 하루 여덟시간동안 180~200리를 달립니다. 이 동무가 한해동안에 짜내는 천만 하여도 100만 미터가 됩니다."
– 고태우, [북한사 100장면], 159쪽 인용

북한은 이화순과 같은 수십 명의 영웅들, 수천 명의 천리마기수들이 탄생하면서 많은 '기적'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철도 노동자들은 3~4년 걸려야 할 해주-하성 간 철도(80km) 부설 공사를 불과 75일 만에 완공하여 북한 사회를 놀라게 했다.

또한 북한은 연간 2만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비날론(합성섬유의 일종)공장을 1년 만에 건설해 주민들의 의복생활에 변화를 안겨주었다.

2. 천리마작업반운동

천리마운동이 어느 정도 본궤도에 오르자 북한은 주민들의 협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1959년부터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진행하였다.

1959년 2월 김일성 주석은 강선제강소를 다시 방문하여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제안을 받아안은 강철직장 3호로 용해작업반원들은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시작하면서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벌일 것을 호소했다.

천리마작업반운동 호소문. Youtube 캡처.

작업반이라는 생산단위에 묶인 노동자들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라는 구호 아래 공동으로 일하고 배우면서 함께 했다.

작업반이 힘을 모아 집단적 성과를 내면 주어지는 칭호가 바로 '천리마작업반'이었다.

평가기준은 단순히 물질적 생산성과뿐 아니라 학습수준, 출근실적, 위생 및 노동시설 상태 등을 반영하여 종합적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첫 천리마작업반은 강선제강소 진응원 작업반이었다.

노동자 진응원은 남쪽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를 남쪽에 두고 온 월북자였다.

홍정자 씨의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에는 천리마운동 당시를 추억하는 진응원 씨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천리마작업반장 진응원. Youtube 캡처.

"지주놈들의 수탈에서 일제의 압박에서 미제의 폭격에서 단 한 번도 기를 펴지 못했고 사람 대접 받지 못했으며 배불리 먹어 본 일 없는 우리가 이제 비로소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도 한번 떳떳이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기 위한 것이라면, 국가의 번성은 곧 나의 번성,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으며 그 꿈은 하루 한시라도 앞당겨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으로 대담하고 기발한 발상을 내면서 혁신에 혁신을 이뤄냈다고 한다.

수기에서 진응원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되 단 한번도 인간 대우를 받아 보지 못한 미천한 우리 근로자들에게 이 같은 막중한 사명을 짊어지우고 선두에 세워 주는 영예를 주었다"면서 "당의 뜻이라면, 그리고 백년대계 후손들에게 물려줄, 다시는 눈물이 없고 피흘림이 없고 그리고 배고픔이 없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도 아낌없이 바쳐 조국을 사수할 것이며 태산도 밀어내고 바다도 막으리라."고 밝혔다.

진응원에 따르면 당시의 천리마작업반운동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천리마는 정직했다. 그 첫날의 결의와 맹세를 실천에 옮겼을 뿐 아니라 강선제강소에 지펴 놓은 불씨는 오뉴월 산불처럼 삽시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근로자들은 이른 새벽부터 직장에 나와 일을 시작했고 퇴근 시간이 지나도 귀가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과로를 염려한 직장마다는 그들을 돌려보내는 일이 큰 문제거리였다."

"그들을 애써 쫓아 보내고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러면 그들은 한밤중 또는 신새벽 누구도 모르는 사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훨씬 앞당겨 성취된 것은 물론 각처에서 공칭 능력을 넘고 상식을 초월하는 초과 생산, 초과 달성의 신기록과 각 분야에서 비약과 혁신, 창조의 환성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천리마운동은 이렇게 해서 심화되고 무르익어 갔다."

대중적 혁신운동의 성과를 낸 작업반은 '천리마' 칭호가 주어졌다.

혁신을 창조한 '천리마 작업반'은 1970년 당시 5만2,920개, '2중 천리마작업반'(2번 칭호를 받음) 2,528개로 늘어났다.

이후 주민생활, 교육, 문화 등 전 분야에 천리마운동이 확산되었고 '천리마'칭호를 쟁취한 단위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1970년까지 천리마인민반(일종의 반상회) 6,925개, 천리마학교 156개, 천리마학부 17개, 천리마학급 1만7,356개가 생겨났다.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던 천리마 시대, 북한은 스스로를 '천리마조선'이라고 불렀다.

(계속)

만리마 특집 기사 소개 :  http://nktoday.kr/?p=15074

※ 참고자료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346~354페이지, 378~391페이지. 
홍정자,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노동자의 책, 77~86페이지, 207~223페이지.
고태우, "북한사 100장면", 가람기획, 159페이지.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