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마시대 특집] 만리마운동의 전신은 '천리마운동'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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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마 특집 기사 소개 :  http://nktoday.kr/?p=15074

 

만리마운동의 전신은 천리마운동이다.

따라서 북한이 규정한 만리마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리마운동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만리마 포스터. 천리마 포스터와 유사하다.

천리마운동은 1956년 12월 "사회주의건설에서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킬 데 대하여"라는 김일성 주석의 제안으로 시작된 운동이다.

당시 온 사회가 '천리마를 타자'는 구호도 들끓었을 정도로 천리마운동은 북한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천리마운동에 의한 급속한 경제성장은 세계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만리마운동이 천리마운동을 본딴 것인 만큼 천리마운동의 배경, 전개과정, 의미, 그 결과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오늘날 만리마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3차례 연재기사를 통해 북한 천리마운동을 집중분석해보고자 한다.

['만리마시대' 특집] 만리마운동의 전신은 '천리마운동'
  ① 천리마운동의 배경과 성과  
  ② 천리마 시대의 영웅들
  ③ 민족과 운명 '노동계급편

 

천리마운동의 배경과 성과 

1. 천리마운동이 제기된 까닭은?

1950년에 발발한 3년간의 한국전쟁은 북한을 완벽한 폐허상태로 만들었다.

1제곱킬로미터(㎢)당 평균 18개의 미군 폭탄이 투하되면서 거리와 온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평양의 경우 솟아오른 건물이 단 두 채에 불과할 정도로 참혹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관개시설과 제방, 저수지들이 파괴되어 37만 정보의 논밭이 피해를 입었고 경지면적은 9만정보(2억 7천만평, 여의도면적의 310배)가 줄어들어 식량생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더 심하게 파괴된 곳은 공장과 기업소였다.

8천7백 개의 공장과 기업소들이 파괴되면서 전쟁 직후 공업생산은 1949년의 64%로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 처참한 현실을 두고 북한당국은 온 주민들에게 전후복구사업에 떨쳐 나서자고 호소했다.

당국의 호소에 떨쳐나선 주민들의 활발한 전후복구활동은 북한이 전쟁 직후부터 1956년(인민경제 복구발전 3개년 계획기간)까지 연평균 공업성장률 46%를 기록하게 했다.

이런 급격한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주민들의 열망과 의지, 그 열정을 불러일으킨 북한당국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여전히 기간산업 부문의 일부는 전쟁 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소비재가 부족해 주민들의 생활은 열악했다.

심지어 전쟁 직후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제공하던 원조가 줄어들 조짐을 보여 위기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1954~1956년 사회주의 국가들이 북한에 제공한 원조액이 당시 북한 전체 예산의 23%에 이르는 수준이었지만, 갈수록 줄어들어 1958년 전체 예산의 4.5%까지 축소되었다.

이런 현황에서 김일성 주석은 주민들의 힘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사회주의공업국가를 건설할 결심을 수립하게 된다.

2. 천리마운동의 과정

천리마운동은 1956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처음 제안되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전설 속의 말이다.

천리마를 탄 기세로 사회주의 건설에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운동이 바로 천리마운동이었다.

그 첫 시작으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 당, 정부 중앙간부들은 주민들의 창조적 열정을 높이기 위해 공장과 농촌으로 직접 들어갔다.

전원회의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철강생산 문제를 풀기 위해 강선제강소를 방문한 김일성 주석은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열의를 발휘할 것을 호소했다.

"강재를 1만톤(t)만 더 생산하면 나라가 허리를 펼 수 있습니다. 나는 동무들을 믿고 동무들은 나를 믿고 조성된 난국을 타개해나갑시다"는 김일성 주석의 호소에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은 호응하고 나섰다.

강선 노동자들이 연 6만 톤 생산능력을 가진 용광로에서 연 9만 톤을 생산하겠다고 결의한 것이다.

그리고 '천리마를 탄 기세'로 열심히 일한 강선 노동자들은 기존생산능력 2배에 달하는 12만 톤의 강재를 생산했다.

천리마운동의 개시와 함께 전국적으로 기존 생산기록들은 연거푸 깨져나갔고 새로운 기술혁신과 성취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천리마운동의 첫해인 1957년, 북한의 공업은 한해동안 44% 성장했고 농업은 대풍작을 이루게 된다.

북한 신문에서는 혁신사례들이 보도되었는데, 화제가 된 것은 바로 트랙터, 자동차 자체생산이었다.

노동자들은 설계도면이나 부속품을 하나씩 그린 다음 직접 두들겨 만들어 35일 만에 트랙터(천리마호)를, 40여 일 만에 화물자동차(승리-58형)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설계도도 없었고 경험이나 장비도 없었다. 우리는 수입해온 모델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분해해 설계도를 그렸다. 선단부 틀을 주조하는데 32번 실패했고 헤드라이트 역시 주형을 만들어 망치로 두들겨 만들어야 했다. 모든 것을 짜맞추고 난 다음에 엔진을 작동시키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최초의 트랙터를 만들었으나 그것이 거꾸로 가서 당황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고쳤고 김일성 주석에게 임무를 부여받은지 35일 만에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트랙터를 평양까지 몰고 갔다."
– 트랙터를 만든 노동자의 발언 요약, 월프레드 버쳇, 김남원 옮김, [북한현대사], 신학문사, 1988.

이렇게 트랙터의 첫 번째 모델이 만들어지자 1960년에는 표준형 15마력짜리 트랙터가 연간 1만 2,500대, 대형트랙터(75마력)가 수백 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김책제철소의 노동자들은 19만 톤(t)의 공칭(공적으로 규정된)능력을 가진 용광로에서 27만 톤(t)의 선철을 생산하는 '기적'을 창조했으며, 황해제철연합기업소 역시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자체로 30만~40만 톤(t)능력의 대형용광로를 세워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북한 전역에서 3~4개월 만에 1,000여개의 지방산업공장들이 자체의 힘으로 건설되었으며 37만여 정보의 논과 밭의 수리화(관개배수시설 설치)가 6개월 만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천리마시대 건설분야에서도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평양 일대에서 대규모주택단지를 건설하면서 주택 1채당 14분 만에 조립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북한은 이를 '평양속도'라고 불렀다.

이것을 본떠 최근 북한에서 려명거리 등 새로운 거리들이 급속도로 건설되면서 '평양속도'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전후복구 당시 평양속도 '신화'의 재창조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3. 천리마운동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천리마운동의 결과로 1960년 초 북한은 급속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1956년 지표들을 100으로 잡았을 때 1960년 국민소득은 210, 공업총생산액은 348, 농업총생산은 150, 실질임금은 210, 노동생산성은 140으로 늘어났다.

농촌의 수리화(관개시설화)와 전기화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고 공업생산이 3.6배 늘어나 연평균 성장률이 36.6%에 달했다.

그리고 1960년 북한은 총생산량에서 공업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중이 농업생산 규모를 훨씬 앞지르게 된다.

이로써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는 전후복구사업과 천리마운동으로 전후 7년 만에 명실상부한 사회주의공업국가로 진입했다.

뿐만 아니라 천리마운동은 공업구조 자체를 바꿔 북한을 자립형 경제구조로 전환시켰다.

과거 원료를 채취하고 반제품 생산을 주로 했던 공업구조가 반제품·완제품 생산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특히 1956년 46.5%였던 기계설비의 국내 자급률이 1960년에는 90.6%로 높아졌고 기계제작, 금속가공 제품들의 생산이 늘어났다.

중공업의 성장은 곧 경공업, 농업으로 이어져 방직, 식료, 일용품 생산이 늘어나 실질적인 주민생활의 향상을 이끌어낸다.

(계속)

만리마 특집 기사 소개 :  http://nktoday.kr/?p=15074

※ 참고자료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346~354페이지, 378~391페이지.
고승효, 이태섭, “현대북한경제입문”, 대동, 1993, 121페이지.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