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개인숭배’ 논란 속의 제3차 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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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북한에는 조선노동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당 대회가 개최된다.

북한 사회주의헌법 제11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명시하여 조선노동당이 북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상하고 국가기관을 지도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1980년 제6차 대회에 이어 36년 만에 열리는 제7차 당 대회는 북한의 향후 방향에 대한 중요한 논의와 결정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NK투데이에서는 북한 제7차 당 대회를 맞이하여 조선노동당의 역사와 구조, 당 대회의 의미, 제7차 대회의 전망 등을 구체적으로 파헤쳐보고자 한다.

그리고 '시리즈 ⑷ 조선노동당, 이것이 궁금하다!' 에서 조선노동당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려 한다.

북한의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NKtoday21@gmail.com 으로 보내주시길 부탁드린다.

<조선노동당 집중 분석>

⑴ 조선노동당의 창건과정과 그 의미
    ① ㅌ.ㄷ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당까지 http://nktoday.kr/?p=11311
    ② 조선신민당의 출현과 양당 합당 http://nktoday.kr/?p=11406
    ③ 합당의 배경과 의미 http://nktoday.kr/?p=11564
⑵ 조선노동당의 구조
    ① 조선노동당 운영원칙과 당대회·당대표자회 http://nktoday.kr/?p=11772
    ② 당 중앙 체계와 지방, 기층 당 체계 http://nktoday.kr/?p=11885
    ③ 조선노동당 체계와 자본주의 국가의 정당 체계의 차이점 http://nktoday.kr/?p=11949
⑶ 조선노동당의 역대 당대회
    ① 조선노동당이 창건된 첫 당대회 http://nktoday.kr/?p=12210
    ② 분단을 막고자 노력했던 제2차 당대회 http://nktoday.kr/?p=12322
    ③ 급속한 경제성장 가운데 열린 제3차 당대회
⑷ 조선노동당, 이것이 궁금하다!
⑸ 조선노동당 제7차 당대회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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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숭배' 논란 속의 제3차 당대회

⑴ 조선노동당의 역대 당대회
③ 급속한 경제성장 가운데 열린 제3차 당대회

 

조선노동당의 당대회는 당 내의 최고의사결정기구다.

북한의 당대회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꼭 필요한 시기'에 개최되어 왔다.

그렇다보니 이번 5월 6일부터 개최되는 제 7차 당대회 역시 6차 당대회에 이어 36년 만에 개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7차 당대회를 앞두고 지금까지의 성과를 '결속'짓기 위한 70일 전투가 북한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역대 당대회는 어떠한 시기에 진행되었고 어떤 내용을 논의했을까?

역대 당대회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도록 한다.

(계속)

제3차 당대회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는 1956년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7일 동안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전체 당원 총 116만4945명의 대표 916명 가운데 914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제3차 당대회는 1953년 한국전쟁 휴전으로 남북분단이 고착화된 상황에서 북한지역 전후복구가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개최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 지역의 관개시설이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제3차 당대회에 즈음하여 북한 주민들과 군인들이 농촌 관개시설 건설을 하고 있는 모습.  ⓒ민족21

한국전쟁 이후 북한 지역의 관개시설이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제3차 당대회에 즈음하여 북한 주민들과 군인들이 농촌 관개시설 건설을 하고 있는 모습. ⓒ민족21

또한 1956년은 국제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당시 소련에서는 흐루쇼프(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제기로 미국과의 평화공존 등 '수정주의' 노선이 제기되고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복잡한 상황 속에서 개최된 제3차 당대회는 김일성 주석의 중앙위원회 사업총결 보고와 토론, 중앙검사위원회의 총결 보고, 당 규약 개정에 관한 보고와 결정, 중앙지도기관의 선거 순으로 진행되었다.

김일성 주석의 권위에 대한 도전

제3차 당대회에서 논쟁이 불거진 것은 바로 김일성 주석의 권위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김일성 주석은 해방 후 한반도 이북지역에서 1946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장, 1947년 북조선 인민위원장,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1949년 조선노동당 위원장을 역임해왔으며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의 최고 사령관직을 수행하여 한반도 이북지역에서 '사실상의' 최고권위자였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주석이 첫 연설을 하는 장면. 이후 김일성 주석은 한반도 이북지역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돈있는 자 돈으로, 힘있는자 힘으로, 지식있는자 지식으로" 의 요지의 연설문을 발표했다. ⓒ민족21.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주석이 첫 연설을 하는 장면. 이후 김일성 주석은 한반도 이북지역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돈있는 자 돈으로, 힘있는자 힘으로, 지식있는자 지식으로" 의 요지의 연설문을 발표했다. ⓒ민족21.

그러나 당대회가 열릴 즈음인 1950년대 중반, 소련에서 '스탈린 개인숭배' 및 '수정주의' 논란이 불거졌고 이것이 북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53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사망한 후 소련 제2대 말렌코프 서기장과 제3대 흐루쇼프 서기장은 과거 '단일지도체계'를 폐지하고 '집단지도체계'를 구축하고자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스탈린주의를 비판했으며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평화공존'을 추구하였다.

이런 변화가 공식화된 것이 바로 1956년 2월 제20차 소련공산당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흐루쇼프 소련공산당 제1비서는 비밀연설을 통해 집단지도체계를 강조한 것이다.

소련공산당의 변화는 곧바로 세계 각국 공산당에게 커다란 혼란을 낳았고 그 영향이 북한에 곧바로 파급되었다.

이미 1955년 10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집단지도원칙을 채택하자 북한 내에서도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지도체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부 세력들은 소련노선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와의 '평화공존'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과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반미반제국주의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은 북한에서 '평화공존' 문제는 쉽게 제기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지도체계에 대한 비판은 적극적으로 드러났다.

제3차 당대회에 참석한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대표는 당 대회 축하연설에서 "대회는 각 당단체들 속에서 위로부터 아래까지 집체적 영도의 레닌적 원칙을 완전히 수립하도록 방조할 것입니다. 이 원칙의 실천은… 당으로 하여금 개인숭배에 관련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합니다"라고 언급하면서 김일성 주석의 권위에 대한 지지를 '개인숭배'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작성하는데 소련 측과의 조정이 필요하다며 북한의 경제노선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서동만 교수의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에 따르면 제3차 당대회에서 리종옥, 최용건, 리일경, 김창만, 한상두, 한설야, 박금철, 박정애 당원 등은 소련 측 주장에 적극 반박해서 나섰다고 한다.

특히 최용건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 기간 우리 당이 걸어온 력사(역사)는 중앙위원회가 지도의 집체성에 관한 맑스-레닌주의적 당 생활 원칙을 소흘히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과 혁명 앞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정상적으로 토의, 결정하는 집체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능숙하게 수행하여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며 조선노동당이 전쟁 중에 당 중앙위원회 3차, 4차, 5차 전원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사실상의 집체적 지도체계를 수행해왔다고 주장했다.

수정주의 노선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은 제3차 당대회에 이어 '8월 종파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제3차 당대회 이후 1956년 8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윤공흠 상업상 등은 소련공산당의 입장을 토대로 김일성 주석을 공격했다.

윤공흠 상업상은 김일성 주석이 제시해 전체 당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중공업 우선 경공업·농업의 동시 발전'과 농업협동화 노선 등을 비판했으며 당 내에서 김일성 주석을 '개인숭배'하는 흐름이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부분의 중앙위원들은 윤공흠 상업상의 논리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임영태 연구위원의 '북한50년사 1'에 따르면 윤공흠 상업상 발언 중간에도 회의장 여기저기서 "발언을 중지시켜라", "끌어내려라"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박금철 조직부장, 김도만 선전선동부 부부장 등 10여 명이 연이어 윤공흠 상업상 등의 주장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결국 압도적인 논쟁에 밀려 윤공흠 상업상 등의 일부 세력의 행위는 '반당 종파행위(개인이나 분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태도)'로 규정되었고, 8월 전원회의에서 "당 내에서 불순한 종파행동은 무조건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그것이 무슨 구실 밑에서 진행되든지 또한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당의 단결을 와해하는 범죄적 행동으로서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핵심 인물이었던 윤공흠, 서휘 당원은 탈당되었고 최창익, 박창옥 내각부수상 등은 당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8월 전원회의 결정서에는 '개인숭배'에 대한 조선노동당의 입장도 제시되었다.

서동만 교수의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에 따르면 결정서에는 "우리는 쏘련(소련)공산당의 쓰딸린(스탈린)의 개인숭배와 관련한 쓰라린 경험을 교훈삼아 우리나라에 존재하였던 개인숭배를 철저히 근절하기 위하여 당원들과 대중들을 계속 꾸준히 교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의 지도자들에 대한 대중의 신임과 존경을 개인숭배와 혼동함으로써 당의 령도(영도)를 훼손하려 하며 당의 중앙집권제를 무시하며, 당 지도부에 대한 불신임을 조성하며, 당의 통일을 방해하려는 옳지 않은 경향에 대하여 당은 경계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즉, 무분별한 '개인숭배'는 반대하되 지도자들에 대한 대중의 신임과 존경을 '개인숭배'와 혼동해선 안 되며 당에서 절차에 걸쳐 결정된 사항을 번복하고 무시해선 안 된다는 식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8월 전원회의 후 탈당된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 등 4명은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때 중국과 소련은 망명한 인물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김일성 주석에게 이들의 지위를 회복시키라고 개입했다.

김일성 주석은 중국 대표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9월 23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해 "비록 이들의 과오가 엄중하다 할지라도 그들을 관대하게 포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과오에 대하여 반성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당적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후 6개월에 걸쳐 '종파행위자'로 분류된 이들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8월 전원회의 결정서'가 구체적으로 실천되면서, 사실상 제3차 당대회로 시작된 '8월 종파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대외 관계의 변화

전쟁 이후 소련․중국이 북한 내부 문제에 개입했던 과정, 소련의 수정주의 노선이 북한에 영향을 미쳤던 상황 속에서 북한은 전반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황이 본격화된 1955년 김일성 주석은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체'에 대한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임영태 연구위원의 '북한50년사 1'에 따르면 논문은 "우리는 어떤 다른 나라의 혁명도 아닌 바로 조선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 사상사업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사상사업에서 주체가 똑똑히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교조주의와 형식주의의 과오를 범하게 되며 우리 혁명사업에 많은 해를 끼치게 됩니다… 조선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역사를 잘 알아야 하며 조선의 지리를 잘 알아야 하며 조선인민의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러한 논지는 소련이 1953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결정된 북한의 중공업 우선 노선을 비판하면서 경공업, 농업 중심으로 갈 것을 요구했던 것, 소련이 북한 내 농업협동화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던 것, 일부 세력이 중국, 소련의 힘에 기대어 권력을 잡고자 시도했던 것 등을 전반적으로 비판하는 흐름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세길 씨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에 따르면, 당시 소련은 자신들의 주장이 북한 내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북한에 대한 원조를 대폭 삭감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전쟁 후 황폐화된 당시 북한으로서는 '주체'노선의 채택이 대단히 어려운 결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북조선'에 따르면 이 논문은 선전이나 문화에서 외국을 따르는 경향도 비판했다고 한다.

논문은 "우리의 선전선동사업에서 남의 것만 좋다고 하고 우리 자체의 것을 소홀히 하는 현상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언제인가 인민군 휴양소에 한 번 가보니 거기에는 시베리아 초원의 그림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풍경은 아마 러시아 사람의 마음에는 들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의 금수강산이 더 마음에 듭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사대주의적인 선전사업도 함께 문제제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주체'의 흐름은 제3차 당대회 때도 드러났다.

우선 당 규약을 수정했다.

조선노동당은 "우리나라의 민족적 독립과 해방을 위해 일본 및 기타 식민주의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한 조선인민의 혁명적 전통의 계승자"라고 수정하여 당의 전통을 민족해방투쟁에서 찾았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은 사업총결보고에서 소련의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평화공존'노선에 대해 "아시아에 대한 미 제국주의의 침략과 일본군국주의의 재생을 견결히 반대하여 투쟁할 것이며… 아시아 인민들의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적극 지지 성원하여야 하겠습니다"고 주장해 사실상 이 노선을 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적용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 운영 전반에서 사대주의, 교조주의(특정한 교의나 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현실을 무시하고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태도), 형식주의를 철저히 없애고 주체를 세우는 것을 당의 기본과업으로 내세웠다.

'주체'의 흐름은 훗날 북한이 다른 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자주', '평화', '친선'의 기치를 세우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북한에서는 '자주', '친선', '평화'라는 기치로 평양국제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2014년에 열린 평양국제영화제 모습. 캡처 : SBS8뉴스|2014.9.18

북한에서는 '자주', '친선', '평화'라는 기치로 평양국제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2014년에 열린 평양국제영화제 모습. 캡처 : SBS8뉴스|2014.9.18

사회주의 과도기로 진입 선언

제3차 당대회에서 전후복구사업에 대한 평가도 진행되었다.

우선, 김일성 주석은 중앙위원회 사업 보고에서 전후복구사업에 성과가 높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보고는 서동만 교수의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에 의하면 북한이 전반적으로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에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먼저 농업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에 있어서 사회주의적 개조를 위한 농업협동화운동이 급격히 장성되고 있는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농업․상공업의 협동조합화

박세길 씨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에 따르면 전쟁 직후 북한 농촌은 전쟁으로 인한 농지 황폐화, 농기구와 비료의 절대적 부족, 관개시설의 파괴 등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몰려 있었으며 오직 기계화만이 농업생산의 급속한 향상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소규모 개인농민들이 거액의 자금이 소요되는 농업 기계화를 이룰 수 없었다.

농민들은 농업협동화를 통해 농기구 등을 공동구매하고 관개시설을 함께 개선하여 농업생산을 향상시킬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이런 농민들의 실정을 파악한 조선노동당은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5일~8일에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토지·농업시설·가축은 조합원 소유, 기술·노동력에 따라 각자의 몫을 분배하는 농업협동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조선노동당은 몇 개의 농업협동조합을 시범적으로 운영하여 농민들에게 그 성과를 보여주었고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기초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농업협동화를 이뤄나간다.

협동조합의 농민들이 가마니를 함께 짜고 있는 모습. ⓒ민족21

협동조합의 농민들이 가마니를 함께 짜고 있는 모습. ⓒ민족21

1953년 8월 농업협동화가 결정된 이후, 불과 2년만인 1955년 봄 영농기에는 총 1만1535개의 조합에 전농가의 44.7%, 경지면적의 44.9%가 가입했으며 제3차 당대회 직전인 1956년 2월 말 1만4651개의 농업협동조합이 조직되어 전농가의 65.6%와 경지면적의 62.1%가 망라되었다고 한다.

평안남도 중화군의 한 협동조합에서 농민들이 옥수수 파종법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민족21

평안남도 중화군의 한 협동조합에서 농민들이 옥수수 파종법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민족21

따라서 김일성 주석은 제3차 당대회의 중앙위원회 사업보고에서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에 들어섰다고 주장한 것이다.

협동조합 농민들이 옥수수파종과 관련한 현황판, 각종 선전자료들을 보고 있는 모습. ⓒ민족21

협동조합 농민들이 옥수수파종과 관련한 현황판, 각종 선전자료들을 보고 있는 모습. ⓒ민족21

뿐만 아니라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 개조도 진척되어가고 있었다.

박세길 씨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에 따르면 일본인 소유였던 북한 공업의 83%가 1945년 해방 직후 국유화되어 해당 도 인민위원회 소속으로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업은 사회주의적 개조가 이미 거의 끝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 소규모 개인상공업은 국유화가 안 된 채 남아 있었고, 북한은 이를 공동소유형태로 전환하기 위해 전쟁 직전인 1949년부터 협동조합화를 추진하게 된다.

김성보 충북대 교수 등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1949년 말 이미 전체 개인 상공업에서 협동조합 비율이 22.5%에 달했으며 전쟁 직후 자본주의적 기업 경영을 하는 상공업자들의 비율이 2.9%정도로 급격히 감소한 상태였다.

거의 모든 북한 산업의 절반 이상이 공동소유․공동분배라는 사회주의적 개조를 이룬 조건에서 개최된 제3차 당대회였기 때문에 사업보고를 했던 김일성 주석은 (북한이) "멀지 않은 장래에 완전한 사회주의 경제 형태로 개조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리고 서동만 교수의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1957년부터 시작될 5개년 경제계획 기간 중 "농촌 경리의 전반적 협동화를 완료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실제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예견했던 대로 농업과 개인상공업의 협동화는 모두 5개년 경제계획 2년째인 1958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전반 농업생산량도 늘어나 이창희의 '북한의 1945~1960년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에 대한 재고찰'에 따르면 1961년에 총 483만 톤의 곡물을 생산하여 북한지역 식량자급을 달성했다고 한다.

"쌀은 사회주의다"라는 구호를 들고 농민들이 파종하고 있는 모습. ⓒ민족21

"쌀은 사회주의다"라는 구호를 들고 농민들이 파종하고 있는 모습. ⓒ민족21

당의 경제노선 확정

소련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제3차 당대회에서 조선노동당은 지난 1953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결정된 노선인 '중공업 우선 성장'방침을 공식화했다.

당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당의 전후복구경제노선을 "중공업의 우선적 장성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경공업과 농업을 급속히 복구 발전시킨다"로 발표했으며 1957년에 시작할 제1차 5개년 계획에서도 "경제발전의 주도적 역할은 우선 중공업이 담당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렇게 되어 제1차 5개년 계획도 1953년부터 이어진 중공업 우선 성장 방향에 따라 추진되었다.

박세길 씨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에 따르면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전반적으로 국내 자원의 40%를 중공업 분야에 투자했으며 특히 모든 경제의 기초가 되는 기계, 화학, 야금, 수력발전, 광업부문에 우선적으로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 결과 5개년계획 마지막해인 1961년, 전쟁 직전인 1949년에 비해 전기가 390만 톤에서 970만 톤으로, 석탄은 120만 톤에서 1200만 톤으로, 강철은 5천 톤에서 79만 톤으로, 시멘트는 10만3천 톤에서 240만 톤으로 급속도로 증가했다.

중공업분야의 성과물은 신속하게 경공업과 농업분야의 발전을 위해 재투입되었고 경공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1954년부터 1962년까지 국민소득의 연평균 성장률이 22.1%에 달했고 1인당 국민소득증가율은 17.2%에 달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다.

1950년대북한경제

급속도로 증강된 중공업의 성과물들은 신속하게 경공업 분야의 발전을 위해 재투입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전 : '조선중앙연감', 1958, 176페이지. 재인용 : '다시쓰는 한국현대사2' 48페이지

당 중앙기관 선거

제3차 당대회 마지막 날 당중앙기관 선거가 진행되었다.

총 71명의 중앙위원, 45명의 후보위원, 11명의 상무위원과 7명의 조직위원을 선출했고 중앙위원회 위원장, 부위원장을 선출했다.

이때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부위원장은 최용건, 박정애, 박금철, 정일룡, 김창만 당원들이 선출됨으로써 당에서의 김일성 주석의 권위는 그대로 유지되게 된다.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가 끝난 후 평양과 주요 도시에서는 당대회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민족21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가 끝난 후 평양과 주요 도시에서는 당대회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민족21

 

※참고자료

임영태, '북한50년사 1', 들녘, 296~325페이지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1945~1961)', 선인, 529~589페이지
김성보 등,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웅진닷컴, 131~132페이지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돌베개, 43~71페이지
이창희, '북한의 1945~1960년 중공업 우선발전전략에 대한 재고찰', 통일정책연구 제22권 1호 2013, 239페이지~266페이지

 <조선노동당 집중 분석>

⑴ 조선노동당의 창건과정과 그 의미
    ① ㅌ.ㄷ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당까지 http://nktoday.kr/?p=11311
    ② 조선신민당의 출현과 양당 합당 http://nktoday.kr/?p=11406
    ③ 합당의 배경과 의미 http://nktoday.kr/?p=11564
⑵ 조선노동당의 구조
    ① 조선노동당 운영원칙과 당대회·당대표자회 http://nktoday.kr/?p=11772
    ② 당 중앙 체계와 지방, 기층 당 체계 http://nktoday.kr/?p=11885
    ③ 조선노동당 체계와 자본주의 국가의 정당 체계의 차이점 http://nktoday.kr/?p=11949
⑶ 조선노동당의 역대 당대회
    ① 조선노동당이 창건된 첫 당대회 http://nktoday.kr/?p=12210
    ② 분단을 막고자 노력했던 제2차 당대회 http://nktoday.kr/?p=12322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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