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를 가다⑬ 황해도 은률읍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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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리즈는 총 20회에 걸쳐 북한의 '범 기독교 교회'들을 탐방한 '북한교회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남한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최재영 목사 이메일: 9191jj@hanmail.net) -필자 주

편집자 주: 통일뉴스 동시 게재

 

지원사상(志遠思想)과 두 교회당

나는 몇 년 전 평양시 외곽에 있는 엄청난 규모의 '무장장비관'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그곳을 천천히 모두 둘러 보려면 사흘은 족히 소요될 정도의 방대한 규모의 군사종합 전시관이었다. 이곳은 1945년 북 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최근까지 70년간 제작해온 북의 육해공군을 총망라한 모든 군사 무기들과 장비들이 전시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은 전시관은 김형직 선생이 그의 장남 김성주(김일성)에게 물려주었다는 권총 두 자루가 전시된 곳이었다. 오늘날 북의 엄청난 모든 첨단 무기들은 그 권총 두 자루부터 출발해 현재의 핵무기와 인공위성까지 만들었다는 '지원(志遠)'의 의미였다.

마침 2014년 7월 9일은 김형직이 출생한지 120주년이 되는 해라서 당과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다. 북 당국에서는 김형직의 '지원사상(志遠思想)'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 인생관이며 대를 이어가며 싸워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전불굴의 혁명정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원사상'도 결국 기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두 교회당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가 북의 공식교회들을 탐방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포평교회'와 '은률읍교회'는 비록 현재 기독교식 예배를 드리거나 종교적인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 두 교회당이 김형직 선생과 관련된 교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의 종교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모델 케이스라고 생각되어졌으며 북의 인민들이 오늘날의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교회는 역사적 현실에 있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곳 은률읍교회당을 통해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 민족주의자이며 항일투쟁가인 김형직 선생과 관련된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으며 그의 지원사상은 장남 김일성 주석과 장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실현되었고 지금도 증손자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고 여겨졌다.

황해남도 은률군에 있는 '은률읍교회당'의 현재 모습. '은률군 김형직 혁명사적관'으로 개관해 활용되고 있다. ⓒ최재영

황해남도 은률군에 있는 '은률읍교회당'의 현재 모습. '은률군 김형직 혁명사적관'으로 개관해 활용되고 있다. ⓒ최재영

 

원형대로 보존된 은률읍교회당

지난 주 량강도 포평교회당에 이어 오늘은 황해남도 은률군에 있는 은률읍교회당을 살펴보고자 한다. 6.25전쟁 당시 이북 전 지역은 기독교 교회당과 종교시설물들이 거의 대부분 폐허가 되었으며 전후 복구건설 사업에서조차 교회당들은 거의 복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은률읍교회당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물론 십자가나 종교적 장식물은 전혀 없고 교회당 건물만 보존된 상태에서 새롭게 개건공사(리모델링)을 한 후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었다.

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과 9.15 인천상륙작전, 1951년 중공군 투입, 유엔군의 1,4후퇴 등 전화의 격동속에서도 다행히 이 예배당은 부분적으로 훼손되기는 했으나 즉시 복구되어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측 당국은 무슨 까닭에 이 교회당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은률읍교회(殷栗邑敎會)가 위치한 지형과 행정구역을 살펴봐야 했다. 황해남도 북서지방에 있는 은률군(殷栗郡)은 북으로는 대동강 하구와 황해로 이어지고, 동으로는 은천군, 동남쪽은 안악군, 남으로는 삼천군과 송화군, 서쪽으로는 과일군과 접해있다. 특히 은률군과 남포시 사이에는 유명한 서해갑문과 구월산이라는 명승지가 있다.

한자로 '은률'이라고 쓸 때 '성할 은(殷)'자와 '밤나무 률(栗)'자를 쓰는데 '성할 은' 자는 지하광석이 풍부한 지역이라는 뜻이고, '밤나무 률' 자는 이 지역에 유달리 밤나무가 많은 '률구(栗口)'라는 포구가 있어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행정구역 개편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조선시대인 1895년에 은률군, 장련군으로 개편되었고, 1909년 들어서는 장련군을 폐지하고 은률군으로 통합됐다. 해방될 무렵에는 7개면(은률면, 일도면, 남부면, 서부면, 북부면, 이도면, 장련면)으로 편성되었고 전쟁중이던 1952년 12월 은률군이 1읍 26리로 재편성되었다.

그후 1988년 7월 서해갑문 남단의 송관리가 남포시 와우도구역으로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1읍(은률읍, 殷栗邑), 1구(금산포노동자구, 金山浦勞動者區), 21리로 구성되었다. 21리를 살펴보면 연암리(鳶岩里), 산승리(山承里), 락천리(樂泉里), 구월리(九月里), 원평리(元坪里), 은혜리(恩惠里, 옛 求王里), 산동리(山東里), 삼리(三里), 운성리(雲城里), 가천리(佳泉里), 대조리(大棗里), 관산리(冠山里), 서곡리(西谷里), 서해리(西海里), 금천리(金川里), 이도포리(二道浦里), 철산리(鐵山里), 관해리(觀海里), 장련리(長連里), 률리(栗里), 금복리(今卜里)가 속해있다.

북의 5대 명산중에 한 곳인 구월산 입구 전경. ⓒ최재영

북의 5대 명산중에 한 곳인 구월산 입구 전경. ⓒ최재영

구월산의 아름다운 가을 단풍 경치. ⓒ최재영

구월산의 아름다운 가을 단풍 경치. ⓒ최재영

 

구월산과 수월천의 정기를 듬뿍받은 예배당

현재 은률군은 여덟군데의 수려한 경치를 뜻하는 '은률팔경(殷栗八景)'이 있을 정도로 가는 곳마다 경이로울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들로 가득한 곳이다. 특히 함경도에는 칠보산이 있고 평안도에 묘향산이 있다면 황해도에는 북의 5대 명산중에 하나인 구월산(九月山)이 있다. 이미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널리 소개되어 우리 남북 민족 모두가 익히 잘 아는 명산이다. 구월산은 황해도의 여러 군에 걸쳐 있을 정도로 그 산맥이 장엄한데 그 가운데 주봉(主峰)이 은률군에 위치해 있으며, 본래 단군의 궁궐터가 있었기 때문에 '궐산(闕山)'으로도 불려졌다. 살아생전에 천제(天帝)가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던 관문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단군신앙과 관계가 있는 영산이다.

특히 구월산 북쪽능선과 계곡에서 발원한 '수월천(水月川)'은 은율지역을 흠뻑 적시며 황해 바다로 유유히 들어간다. 단풍의 계절이 오면 마치 불타는 듯한 황홀경을 펼쳐지며 온 골을 뒤덮는 경치는 실로 찬탄할 정도이며,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기묘하게 드러난 봉우리와 절벽, 쏟아지는 폭포, 계곡 곳곳에 드러난 수정같은 담소들이 신비경을 이루고 있다.

수월천에서 흐르는 개울이 은률읍을 통과는데 주민들은 이를두고 평소 '남천' 혹은 '남천개울'이라 불었으며, '남산' 앞으로 흐른다고 해서 '남산천'이라고도 하고, 수달이 많이 살아서 '수다리 개울'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남천 옆에 있는 마을을 '남천리'라고 했는데 1898년 그 수월천 물가 근처에 은율읍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당시 은률읍교회의 주소는 '황해도 은률군 은률면 남천리(南川里)'였다. 그후 이 마을은 1952년에 은률읍에 편입되어 행정구역상의 위치는 '황해남도 은률군 은률읍 남천리'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최초의 은률읍교회당은 헐리고 세 차례 재건축되었는데 특히 1914년에는 은률읍교회 담임을 맡은 우종서 목사에 의해 큰 규모의 교회당이 건축되었다. 그후 또 다시 건축된 새 예배당은 남녀 신자들이 출입하는 문이 각각 별도로 있었으며 통상 기역자(ㄱ) 모양의 조선식(한옥) 기와집 구조로 건축되어 그 건물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해방 전에는 은률읍내에 거주하는 무수한 교인들이 찾아와 예배를 드리던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 교단 소속의 교회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전쟁 직전까지는 인민 정부하에서도 줄곧 원만하게 운영된 교회였다.

은률읍교회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조선교회 역사상 최초의 개신교회로 기록되는 '소래교회'가 1883년에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졌는데 이 교회의 행정구역상 위치는 행정개편에 따라 '황해남도 룡연군(龍淵郡)'에 속했다. 또한 은률읍교회당 바로 지척에는 6.25전쟁 전날까지 시무했던 윤의병 신부(제8대 주임사제)가 사목하던 천주교 은율성당(본당)이 교회당과 가까이 서 있었다.

은률읍교회의 담임교역자와 연혁

은률읍교회는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이 지역을 전도한 이후 그 결실로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어 그들에 의해 1898년에 세워졌다. 우선 은률읍교회를 담임했었던 목회자들중에 주목할 만한 교역자들을 노회와 총회기록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1912년에 우종서(禹鍾瑞)목사가 전도목사로 부임했는데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 3회 (1910년) 졸업생이며 독립운동가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우 목사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직접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한 장본인이다. 백범이 기독교에 귀의한 때는 부친 탈상이 끝난 1903년 말이었으며 당시 백범은 스물일곱살이었다. 백범의 친구였던 우종서 전도사의 직접적인 전도가 계기가 된 것이다. 백범은 동학교 아기교주를 비롯해, 불교승려등 다양한 종교편력을 경험했던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심령 기저에는 언제나 기독교 신앙이 기초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하는 날까지 서울 남대문장로교회를 출석하며 김치선 목사를 통해 신앙생활을 했다.

백범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우 전도사가 그의 가족을 돌봐주었으며 '백범일지'에도 우 목사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했다. 우 전도사는 예수를 믿은 직후부터 열심히 전도생활을 해서 목사가 되기 전부터 이미 황해도 여러 곳에 교회를 설립했는데 특히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독립단이라는 항일단체 단원들이 국내로 잠입해 구월산에 숨어 무장투쟁을 했을 당시 은률군수가 친일파 행각을 벌인다는 정황이 포착되자 은률군청을 습격해 군수를 사살하기도 했다. 이때 독립군 단원들과 협력했던 우 전도사는 이 일이 탄로가 나자 일제에 의해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후 우목사가 은률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인 1914년에 교회당이 새로 건립되었고, 이때 그 교회가 주도해 은률학교도 설립되었다. 우 목사 후임은 임택권(林澤權) 목사가 부임했는데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7회(1914년) 졸업한 인물이며 신학교를 졸업한 해에 목사 안수를 받고 그 다음 해인 1915년에 은률읍교회에 부임했다. 은률읍교회에서 3년 간 사역하고 1918년에 일본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임 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에 안신(安信)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목회를 하면서 재령에 있는 명신(明新)학교 교장도 역임하는가하면 1924년에는 장로교 총회장을 지냈던 교육가이자 교단 행정가였다. 그후 1936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 28회(1933년) 출신인 정재호(鄭在浩) 목사가 부임했다. 숭실전문학교도 졸업한 정 목사는 은율읍교회에 부임 전에는 숭실중학교 교목 겸 사감으로 학생들을 지도했고 은률읍교회를 담임하던 중에 병을 얻어 결국 1949년에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에서 운명했으며 곧이어 6.25전쟁이 발발해 은률읍교회는 폐쇄되고 말았다.

황해도 은률읍교회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의 전도에 의해 설립됐다. ⓒ최재영

황해도 은률읍교회는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의 전도에 의해 설립됐다. ⓒ최재영

백범일지에는 자신을 도와주고 전도한 친구 우종서 목사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최재영

백범일지에는 자신을 도와주고 전도한 친구 우종서 목사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최재영

 

'옛 례배당'으로 불리며 해설사도 근무하는 '은률읍교회당'

현재 은률읍교회당은 매우 깨끗하고 단아한 전통 기와집 건물구조로서 주변 경관과 매우 잘 어울리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특히 건물 주변의 인공 조경은 기와집 건물을 한 층 더 돋보이게 했다. 이곳은 김일성 주석의 부친 김형직의 황해도 지역에서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혁명 사적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명실공히 김형직의 이북 서부지역 항일운동 사적지로서 각계 각층의 북 인민들이 개인 혹은 단체로 속속 찾아와 참관을 하거나 교육을 받는 곳으로 변모한 것이다.

오래 전 북이 자체 발간한 화보집에서도 이 교회가 '옛 례배당'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되며 잡지에 교회당 사진과 함께 보도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이 교회당 마당 한 가운데는 김형직의 황해도 지역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적비가 세워져있으며 김형직과 이 교회와의 연관성도 기록해 놓고 있다. 이곳에는 거의 매일 북 인민들과 학생단체, 노동자단체들이 연달아 찾아와 참관하고 있으며 조선옷(한복)을 입은 해설사(강사)가 배치되어 단정한 자태로 열정적인 설명을 하고 있었다.

북 당국은 웬만해서는 옛날 교회당 건물을 이런 식으로 보존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며 량강도 포평교회와 더불어 매우 희귀한 사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참관을 하고나면 북 당국이 왜 이 교회당을 잘 보존하고 사적지 역사순례 탐방지로 활용하는지 알 수 있다. 김형직의 다양한 항일운동 궤적들이 이곳 황해도 은률과 구월산 인근에서도 활발했기 때문이다. 앞서 포평교회 편에서도 밝혔듯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평양 숭실학교를 다녔던 김형직은 이곳 황해도 지역에서의 독립운동도 이 은률읍교회를 거점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현재 북에는 독립운동을 한 김형직을 기념하는 동상(전신상)이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에 조성되어있고 '평안북도 삭주군 남사로동자구',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등 전국에 모두 3곳이 세워져있다. 반신상도 있는데 이 반신상은 만경대에 조성된 김일성 주석의 부모인 김형직과 강반석의 묘소앞에 각각 세워져있다. 또한 김형직을 기념하는 사적관은 이곳 황해남도 은률읍교회당에 개관되어 운영중이고, 량강도 포평교회당은 김형직과 그의 아들 김일성 주석의 발자취가 서린 혁명사적지로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이와같은 일들은 단순히 김형직이 김일성 주석의 부친이라는 이유 때문에 북 당국이 가족들을 미화하려는 차원에서 기념비나 동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북 당국은 김형직의 항일운동과 독립운동 행적들은 철저히 검증된 사료들만을 채집하고 있으며 지금도 남과 북은 물론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꾸준히 발굴되거나 연구되고 있는 중이다. 그의 짧은 인생이 오로지 조국의 해방과 항일 독립운동에 전념한 것이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곳 황해도 지역에서 김형직이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만경대에 있는 김형직, 강반석 묘소앞에 세워진 부부의 청동반신상의 모습. ⓒ최재영

만경대에 있는 김형직, 강반석 묘소앞에 세워진 부부의 청동반신상의 모습. ⓒ최재영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에 조성된 김형직 선생의 동상앞에 헌화하는 인민들. ⓒ최재영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에 조성된 김형직 선생의 동상앞에 헌화하는 인민들. ⓒ최재영

 

교회당이 '은률군 김형직 혁명사적관'으로 변모한 사연

은률군에는 이곳 은률읍교회당에 개관한 '은률군 김형직 혁명사적관'외에도 구월산성 중심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구월산성 혁명사적지'가 있다. 산성 사적지 부근에는 구월산성집과 군사훈련터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원래 구월산성집은 고구려 시기 산성을 지키던 별장의 집이었는데 독립운동을 하던 김형직이 자신의 장남 김성주(김일성)이 태어나던 해인 1912년 11월 이곳을 방문해 '황해도 반일조직 대표자 회의'를 지도하면서 숙식했던 유서깊은 곳이라고 전해진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휴학한 김형직은 잠시 고향에 돌아와 순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후에 자리를 옮겨 강동군 고읍면(지금의 행정구역상 강동군 봉화리)에서 '명신학교'를 열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을 보면, 김성주가 다섯 살 때 가족들이 강동군 봉화리로 이사한 후 조선국민회 문제로 일경이 부친 김형직을 체포하자 봉화리의 기독교인들이 석방을 위해 김형직이 교편생활을 하던 명신학교에 모여 새벽기도를 드린 일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형직은 봉화리에서도 신앙생활을 했다. 이처럼 김형직은 황해도 지역과 은률군을 여러차례 방문해 비밀활동을 하던 중 이곳 은률읍교회를 구심점으로 교인들과 반일인사들을 규합해 반일활동을 하며 항일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해 1925년 4월에 작성된 김형직에 관한 관헌기록중에는 "대정 8년(1919년) 3월, 조선독립 소요사건의 주모자"로서 체포를 피하려 "동년 5월, 대안으로 도주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김형직이 3.1운동에 깊이 주도하고 관여한 정황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그후 김형직은 중국의 임강으로 이사해 '순천의원'을 차렸는데 방문자의 태반은 독립운동가였다.

1921년 4월, 백산무사단에 소속한 김일성 주석의 외삼촌 강진석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당시 백산무사단은 평안도지방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무장단체였다. 본부는 림강현에 있었으며 국내활동지점은 중강, 초산, 후창을 비롯한 평안북도 일대와 멀리 평양, 수천, 강서지방까지 널리 퍼져 있던 단체였다.

결국 외삼촌 강진석의 체포 때문에 김형직은 임강에서 팔도구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 '광제의원'을 차렸으며 이곳에 있는 포평예배당을 통해 신앙생활과 함께 반일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또한 연이어 1921년에는 황해도 구월산으로 들어가 황해도지역의 독립군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했다.

구월산 '지원폭포골'은 당시 김형직이 지원(志遠)의 높은 뜻을 안고 팔도구 포평지역에서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되기 전인 1921년 11월에 구월산에 들어가 황해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항일 혁명 활동을 했다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김형직은 1924년 말 일제에 체포되어 평북(지금의 량강도) 포평(葡坪)에서 후창(厚昌)으로 압송당하는 도중 김형직의 친구가 일본경관에게 술을 먹이고 취하게 한 틈을 타서 압록강을 건너 무송(憮)松)까지 극적인 탈출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두 번이나 심한 동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5년, 무송에 '무림병원'을 차리는 한편 민족주의 운동단체등을 망라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한의원을 통해 벌은 돈으로 항일무장단체에 정기적으로 자금을 공급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결국 감옥에서 얻은 병과 탈출시 발병한 동상 환부등 건강이 악화되어 1926년 6월 운명했다.

구월산의 '산성혁명사적지'모습. 김형직이 1912.11 이곳에서 '황해도 반일조직 대표자 회의'를 주도하며 숙식했던 장소로 알려졌다. ⓒ최재영

구월산의 '산성혁명사적지'모습. 김형직이 1912.11 이곳에서 '황해도 반일조직 대표자 회의'를 주도하며 숙식했던 장소로 알려졌다. ⓒ최재영

총 둘레가 5,230 미터에 달하는 황해도의 5대 산성중에 한 곳인 구월산성 옛터. ⓒ최재영

총 둘레가 5,230 미터에 달하는 황해도의 5대 산성중에 한 곳인 구월산성 옛터. ⓒ최재영

지원폭포골 모습. 김형직이 1921. 11 이곳에서 항일운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최재영

지원폭포골 모습. 김형직이 1921. 11 이곳에서 항일운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최재영

김형직이 명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기념한 북한 우표. ⓒ최재영

김형직이 명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기념한 북한 우표. ⓒ최재영

 

항일투쟁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김형직과 가족들

김형직(金亨稷)은 1894년 7월 10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26년 6월 5일에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직에게는 평소 남동생 김형권(金亨權), 누이와 여동생 김구일녀(金九日女), 김형실(金亨實), 김형복(金亨福)등의 형제를 두었다. 강반석과 결혼한 김형직은 장남 김성주(김일성)를 비롯해 철주, 영주등 3남을 두었는데 지면상 일가족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이야기를 모두 언급할 수 없으나 대표적으로 김형직의 동생 김형권과 아들 김철주의 예를 잠간 들어 보도록하자. 또한 김형직의 처남 강진석, 장인 강돈욱등을 비롯한 처가 어른들도 적극적인 민족운동과 계몽운동, 항일운동을 했다.

우선 동생 김형권은 국민부(國民府) 군자모집대 최효일(崔孝一)과 함께 1930년 8월 풍산군 안산면 내승리(豐山郡 安山面 內中里) 주재소의 송산(松山) 순사부장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또 동년 9월 3일 북정(北靑)서의 강성(岡城) 순사를 권총으로 쏘아 부상케한 사건등으로 체포돼 1932년 4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최효일 사형, 박차석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수감중 고문등의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운명했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에 모두 6회 정도 상세히 보도됐다(1930.09.04자 2면, 1930.09.05자 2면, 1931.02.06자 2면, 1931.10.16자 2면, 1931.11.23자 2면, 1932.03.08자 2면 등).

뿐만 아니라 차남 김철주는 1926년 소학교에 다닐 때 장남 김성주가 조직한 '새날소년동맹'의 성원이 되어 신문 '새날' 발행에 참가하던 중 1930년대 초반 항일유격대에 입대해 1935년 연길의 석인구 인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20세의 나이로 전사해 그의 유해를 아직도 발견하지 못해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는 가묘만 조성돼있다.

김형직 선생은 김일성 주석의 부친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부, 현재의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증조부가 된다. 김형직이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했음을 입증하는 사료들은 북에 더 편중되어 있으나 일본과 중국은 물론 남측에도 더러 확보되어 있다. 그러나 북의 자료와는 별도로 지난 2005년 3월 23일에는 충남 천안에 있는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측이 김형직의 독립운동과 관련한 사료를 소장하고 있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현대사 자료'(강덕상 편저, 1967) 조선편 제1권은 "김형직은 항일 조직인 조선국민회에서 활동하다 1918년 2월 18일 평안남도 일경에 의해 검거돼 형사소추를 받았다"는 사료 원본을 근거로 기록돼 있다. 당시 일제 '평안남도 경무부장 보고요지'에는 김형직이 서당교사로 '평안남도 강동군 정읍면 동 3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회장 장일환(1886~1918)과 백세빈, 배민수 등 조선국민회 회원 25명의 본적과 주소, 나이, 역할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독립기념관이 최초로 공개한 이 자료에는 재미 항일단체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1918년 9월 12일자 보도에도 "(일제 당국이) 2-3월부터 평양, 경성, 공주 등 각처에서 다수 한인 인사를 (조선국민회 관련자로) 포박했다"는 자료도 있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 3월 23일 장일환의 주도로 평양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출신 교사와 재학생 등이 결성한 비밀 조직으로 그 조직망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던 중 이듬해 2월 일제 당국에 발각됐다.

북은 조선국민회를 3·1운동 전후 가장 큰 반일 지하혁명조직으로 높이 평가하며 김형직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남측의 관제역사학자들은 그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만을 불러 일으키며 축소와 왜곡을 일삼고 있다. 이미 사실여부로 검증된 항목들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좋다.

이에 대해 이화여대 사학과 강영심 박사는 그의 논문 '조선국민회연구'(1989년)에서 "일제에 의해 밝혀진 조선국민회 회원은 25명이지만 이와 관련된 지역과 인물들이 적지 않았으며 다른 비밀결사보다 더욱 치밀하게 비밀을 유지하면서 조직을 확대하고 무력양성 계획까지 세웠다"고 연구결과를 자세히 설명했다. 강 박사는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사건 이후 중강진으로 이사해 3ㆍ1만세운동을 지도하고 1925년에는 길림성 무송현(撫松, 푸송현)으로 옮겨 정의부(正義府)계열 무장단체인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과 연계해 활동하다 이듬해 운명했다"고 밝혔다.

권총으로 일본순사 부장을 살해하는 등 항일투쟁을 했던 김형직의 동생 김형권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최재영

권총으로 일본순사 부장을 살해하는 등 항일투쟁을 했던 김형직의 동생 김형권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최재영

좌측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현대사자료 조선편 제1권, 1918. 2.18. 일제에 체포된 조선국민 회원 명단 속에 김형직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우측은 1918.9.12자 신한민보 의 조선국민회 관련자 체포기사. ⓒ최재영

좌측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현대사자료 조선편 제1권, 1918. 2.18. 일제에 체포된 조선국민 회원 명단 속에 김형직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우측은 1918.9.12자 신한민보 의 조선국민회 관련자 체포기사. ⓒ최재영

 

최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