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를 가다⑫ 량강도 포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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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리즈는 총 20회에 걸쳐 북한의 '범 기독교 교회'들을 탐방한 '북한교회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남한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마치 초대교회 형태처럼 정착한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필자 주-

(최재영 목사 이메일: 9191jj@hanmail.net)

편집자 주: 통일뉴스 동시 게재

 

포평리 혁명사적지에 있는 포평교회당

평양에서부터 자동차로 여섯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가면 압록강을 끼고 있는 량강도의 포평혁명사적지가 나온다. 이북 국경의 대표적인 양대 강줄기인 압록강과 두만강이 동시에 흐르는 지역이라고 해서 유래된 이름인 량강도(兩江道)에 자리한 포평리(葡坪里)는 1920년대 당시 평안북도 후창군 동신면 포삼동이었으며, 지정학적으로는 혜산에서 서쪽으로 360여 리, 강계에서 북동쪽으로 360여 리 떨어진 압록강 기슭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포평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예로부터 머루넝쿨이 많은 평평한 들판이라고 하여 '포평(葡坪)'이라 불리웠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량강도 김형직군 포평리'이며 바로 옆에는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 압록강 건너편에는 만주 땅 장백현 팔도구가 멀리 내다 보이는데 이는 김일성 주석의 부친인 김형직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 실제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하던 거점지역이었으며 포평리 또한 그의 생애 발자취가 곳곳에 깃들여 있는 곳이다.

포평리 혁명사적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당도하는 곳이 '포평나루터'인데 김형직은 1921년 여름부터 1924년 말까지 팔도구에서 압록강을 빈번하게 건너다니며 이곳 나루터를 이용했으며 1921년 여름부터는 독립운동의 거점을 중국의 임강에서 팔도구로 옮긴 후 이곳에서 적극적인 독립활동을 벌였다.

당시 팔도구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김성주 소년(김일성 주석)은 부친 김형직의 독립운동을 도와 이 나루터를 건너면서 비밀 연락임무등을 수행했으며 1923년 3월 '배움의 천리길'과 1925년 1월 '광복의 천리길' 여정을 걸을 때 바로 이 포평나루터를 이용해 압록강을 건넜다. 두 부자의 역사적 사연이 깃든 나룻배와 나룻터, 기념비등을 둘러보며 이 나루터에서 서쪽으로 40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치공작소로 사용되던 '그물터'를 방문하고 나면 마지막 코스로 포평례배당(교회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포평혁명사적지'에 세워진 '광복의 천리길' 여정의 소년 김성주의 동상. ⓒ최재영

'포평혁명사적지'에 세워진 '광복의 천리길' 여정의 소년 김성주의 동상. ⓒ최재영

기와집 형태의 포평교회당

'그물터'와 '정치공작소' 관람을 마치고 나면 이미 사진을 통해 익숙히 알고 있는 포평예배당이 저 멀리서 한눈에 들어온다. 예배당을 발견하고 나면 오랜 여정으로 다리가 풀리는 듯하며 이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만감이 교차되며 알 수 없는 미묘한 생각들에 사로 잡히기 시작한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직후 폐허가 된 이북의 교회당들은 복구되지 않고 가정교회 형태로 지속되어왔으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유일하게 반도의 상단 외딴 지역에 개신교 교회당 한 채가 홀로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가까이 당도해 살펴보면 외형은 교회당이라고는 차마 말 할 수 없을 정도의 초라하고 평범한 살림 가옥 한 채가 보이는데 바로 이곳이 포평교회당이다. 일반 동네 교회당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종탑이나 십자가탑을 갖추지 않은 매우 소박한 기와집 예배당에 불과하다.

김일성 주석도 자신과 가족들이 다녔던 이 교회당의 외관에 대해 "보통 동기와집으로서 사이벽을 터쳐 통간으로 쓰는 것이 여느집과 다를 뿐이었다"고 회고록에서 추억했다. 현재 이 교회당은 매주 일요일 마다 주일예배를 드리거나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사역교회가 아니다. 또한 예배당으로서 갖추어야할 건축양식이나 종교적인 장식물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그 어떤 강렬한 영적 포스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겉은 초라하지만 그 어떤 화려한 예배당 보다 역사적으로 더 많은 일들을 감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삼형제였던 김일성(성주) 주석은 동생 철주, 영주를 비롯해 부친 김형직, 모친 강반석, 작은 아버지 김형권 등 모든 집안 식구들이 빠지지 않고 이 교회를 출석해 예배를 드리거나 예배 후에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항일 계몽을 했다. 비록 매우 작은 규모의 교회당이지만 포평혁명사적지 타운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 자신은 물론 그의 외가와 친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는 사실을 그동안 자세히 다루었으나 이처럼 이북의 외딴 지역에도 김일성 주석과 그 일가족의 항일운동 발자취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 생활의 면모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예배당 내부에는 김일성 주석 모친인 김형직과 모친 강반석이 포평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항일 계몽 교육을 하는 장면을 담은 대형 그림 두 개가 각각 큰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부부의 항일혁명 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활약을 펼치는 장면을 담은 이 혁명화들은 마치 일반 교회당에 걸려있는 성화처럼 예배당 좌우에 걸려있다. 이미 평양에 있는 칠골교회당과 그 주변에 조성되어 있는 강반석 기념공원이 김일성 주석의 모친 강반석을 기념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이곳 포평교회당은 주로 김일성 주석의 부친 김형직을 기념해 조성한 사적지이며 동시에 조국 광복을 위한 김일성 주석의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을 기념하는 사적지이다.

동기와집 형태의 포평교회당 모습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있다. ⓒ최재영

동기와집 형태의 포평교회당 모습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있다. ⓒ최재영

예배당 내부에는 김형직이 예배를 마친 후 남성신자들에게 항일계몽교육을 하는 장면이 그림으로 걸려있다. ⓒ최재영

예배당 내부에는 김형직이 예배를 마친 후 남성신자들에게 항일계몽교육을 하는 장면이 그림으로 걸려있다. ⓒ최재영

예배당 내부에는 강반석 여사가 예배를 마친 후 여성신자들에게 항일계몽교육을 하는 장면이 그림으로 걸려있다. ⓒ최재영

예배당 내부에는 강반석 여사가 예배를 마친 후 여성신자들에게 항일계몽교육을 하는 장면이 그림으로 걸려있다. ⓒ최재영

 

포평교회의 유래와 역사

북측 당국이 예배도 드리지 않는 이 교회당을 지금까지 수십 년간 보존하고 관리하는 이유는 김일성 주석과 그의 집안 어른들의 독립운동과 항일투쟁과 관련한 발자취를 보존하려는데 있으며 아울러 그 과정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문 태생이었던 김일성 주석과 그의 친가 가족들이 교회를 통한 항일운동의 발자취가 확인된 것이다. 이 포평리 사적지는 소년 김성주가 12세 때인 1923년 3월에 부친 김형직의 뜻에 따라 조국을 배우기 위해 만주의 팔도구에서 고향인 평양 만경대까지 17일 동안 걸어 온 도보 코스이며 북 당국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74년 3월 31일부터 각급 학교 및 조직별로 청소년과 학생 행군대를 조직해 소위 '배움의 천리길' 답사행군을 실시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행군경로는 '양강도 김형직군 김형직읍 포평리'에서 시작해 월탄리-화평-흑수-강계-성간-전천-고인-청운-희천-향산-구장-개천-만경대 코스로 되어 있다. 행군명칭은 천리길(약 400km)이지만 실제 학생들이 걷는 거리는 약 300km 정도라고 한다. 한편 북 당국은 김일성 주석이 14세 때인 1925년 2월 5일 "조국이 독립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또다시 도보로 만경대를 떠나 만주의 팔도구로 돌아가는 경로를 '광복의 천리길'이라 호칭했으며 이 경로는 만경대에서부터 '배움의 천리길' 경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서 역시 당국에서는 1975년 2월 6일부터 청소년 학생들의 답사행군 코스로 지정해 행군을 실시하고 있다. 이처럼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포평리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포평혁명사적지'가 조성된 것과 그 한복판에 위치한 포평교회당이 시사하고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

'배움의 천리길' 행군을 하고 있는 북의 청소년들 모습. ⓒ최재영

'배움의 천리길' 행군을 하고 있는 북의 청소년들 모습. ⓒ최재영

엄동설한에도 '광복의 천리길' 행군을 하는 북의 청소년들 모습. ⓒ최재영

엄동설한에도 '광복의 천리길' 행군을 하는 북의 청소년들 모습. ⓒ최재영

'광복의 천리길' 행군을 마치고 평양으로 복귀한 학생들을 연도의 시민들이 환영하는 모습. ⓒ최재영

'광복의 천리길' 행군을 마치고 평양으로 복귀한 학생들을 연도의 시민들이 환영하는 모습. ⓒ최재영

평양 만경대에 위치한 '광복의 천리길' 장면이 그려진 벽화 모습. ⓒ최재영

평양 만경대에 위치한 '광복의 천리길' 장면이 그려진 벽화 모습. ⓒ최재영

 

사적지 답사 코스

포평나룻터와 그물터, 포평예배당을 거쳐 생전의 김일성 주석 부모가 청년들과 여성들을 대상으로 반일애국사상으로 교양하였다고 전해지는 함경도집 야학방과 포평국수집을 연이어 답사한 후 비밀연락장소로 이용한 당시 헌병보조원의 집과 우편물위탁소, 포평 경찰관주재소 등을 두루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무기보관장소로 이용하였다던 용바위집은 포평나루터에서 혜산쪽으로 약 5리 가량 떨어진 압록강 기슭 큰 길가의 큰 바위곁에 서있는 귀틀집의 모습이며 해설자의 말대로 이 용바위집의 지형조건은 무기보관 장소로서는 아주 적합한 곳으로 보인다.

집 옆은 용바위로 막히고 집 앞은 울창한 버드나무숲으로 가려져 있으며 집 뒤에는 전모봉이 솟아 있어서 비밀활동을 하기에는 아주 최적의 자리처럼 보이는 이곳은 집 안에 보관된 무기들도 돌아보고 집 뒤에 있는 전모봉도 관망할 수 있는데 마치 모자를 쓴 것처럼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매우 독특하게 보인다. 당시 김형직의 지도를 받은 무장대원들은 후창과 삼수, 갑산 일대에서 남사목재소습격전투, 장승벽전투 등 대소전투들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김형직이 자주 이용하며 회의를 했다는 포평회의장소를 돌아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포평혁명사적지에 대한 답사 참관일정이 모두 마쳐진다.

김일성 주석의 부친 김형직 선생은 항일투쟁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운명하였는데 그는 일찌감치 '뜻을 원대하게 품으라'는 의미의 '지원사상(志遠思想)'을 통해 민족의 자력으로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려했다. 이런 부친의 발자취를 이어받은 아들 김성주를 통해 다시 한번 부전자전이라는 옛날의 고사성어를 떠올린다. 부친의 숭고한 애국정신의 뜻이 그의 아들 김성주에게 항일투쟁의식과 민족자주위업 실현에 큰 밑천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형직의 애국정신과 기독교신앙

나는 여기서 김형직 선생이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실학교를 다녔으며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 포평교회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섬겼던 일들 그리고 김형직의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평양에 있던 숭실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가 된 이후에 한국교회가 다시 뜻을 모아 해방이후 서울 상도동에 학교를 복원해 현재는 명실상부한 기독교명문 사학 숭실대학교가 되었다. 이 숭실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산파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숭실대 초대 이사장을 지낸 배민수 목사이다.

한편 배 이사장과 함께 당시 초대 총장을 지낸 이가 바로 서울영락교회 설립자 한경직 목사였다. 배 목사는 김일성 주석의 부친인 김형직과 동시대에 학교를 다닌 숭실학교 동문으로서 자신이 학창시절에 김형직과 함께 겪은 이야기를 그의 자서전에 기록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훗날 배목사는 연세대학교 일산캠퍼스 부지를 기증해 학교측은 그의 여러가지 공로를 기념해 일산 캠퍼스에 '삼애교회'라는 기념교회를 세웠고 매주 예배를 드린다.

배민수가 숭실학교 1학년인 어느 날, 당시 4학년이던 노덕순이 그를 찾아와서 서로 의기투합하였고 그를 통해 김지수, 이보직, 박인관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을 배민수에게 소개해주어 알게 되었는데 1 년이 지난 후 그 3인들에게서 김형직을 소개받았다고 한다. 김형직을 소개받을 때 "그는 만주에서 왔으며 조국독립에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만주의 지하운동과 게릴라운동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가 말 할 때마다 나는 그에게서 강렬한 정신과 열정을 느꼈다. 대화가 끝난 후 우리는 같이 기도하였다"고 배목사는 자서전에 증언했다.

결국 이들 그룹의 만남이 훗날 기독교 항일투쟁 단체인 '조선국민회 조선지회' 조직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배민수는 김형직과의 만남을 통해서 무장투쟁, 독립전쟁 노선에 입각한 급진적 기독교 민족주의자로 성장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배민수가 김형직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게서 일제 강점기 직후의 운동현황과 향후 활동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서로가 의기투합해 조국독립을 위한 의욕과 결심을 다졌다고 한다.

더구나 배민수는 김형직과 더불어 그룹들과 함께 모일 때마다 "우리는 항상 눈물로 기도하였다. 우리는 예수가 가르친 자유와 희생정신을 믿었다. 어떻게 조국을 해방시킬 것인가 하는 것만이 우리의 관심사이자 희망이었다. 이런 삶에서 애국심이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생히 증언했다. 김형직에 대한 배민수의 인상은 강렬한 것이었고 당시 17세였던 배민수에게 김형직은 "우리가 힘을 합치면 조국해방을 위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민족해방의 신념을 각인시켜주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1913년 여름 김형직이 직접 제안하여 평양 기자묘(箕子墓) 숲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서하는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평소 기독교인들은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는 경우가 매우 드문데 김형직이 앞장서 직접 실천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각오와 결단 그리고 의지가 매우 견고하고 강렬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훗날 교회사가들과 역사가들은 "배민수, 김형직, 노덕순 이 세 사람의 '단지혈서 서약(斷指血書 誓約)'은 이와 같은 혈기 넘친 애국청년들의 동지적 교류의 상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배민수는 자서전에서 조국독립에 대한 열정과 김형직에 대한 동지애, 존경심을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통해 자서전에서 표현하였을 정도였다.

"아버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신 주의 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우리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나라를 구하도록 도와주옵소서…..(중략)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동지들을 원합니다. 나의 친애하는 형제 김형직을 축복해주옵소서. 그가 우리 백성을 구하는 충실한 주의 종이 되도록 하옵소서. 그의 가족과 친구를 축복해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처럼 배민수를 비롯한 숭실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조선국민회 조선지회' 멤버들은 비밀학생 그룹에 참여하여 동지적 교류와 사상적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과거 원초적 형태의 항일의식을 벗어나 독립운동의 의미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체득하였고 절대독립노선을 견지한 기독교 청년운동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도산 안창호의 실력양성노선에 영향을 받은 평양의 주류 민족운동노선과 길을 달리하는 형태였다.

특히 김형직을 비롯한 이들 그룹원들은 처음부터 만주 무장투쟁과 독립전쟁 그리고 이와 연계된 조직운동에 주력했던 것이다. 포평리사적지를 돌아보면 김형직의 애국정신과 기독교 신앙심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직접 행동으로 실천한 사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평양 숭실학교 재학시절 조선국민회를 조직한 김형직 선생의 모습. ⓒ최재영

평양 숭실학교 재학시절 조선국민회를 조직한 김형직 선생의 모습. ⓒ최재영

김형직과 숭실학교 동문이자 같이 활동했던 숭실대 초대 이사장 배빈수 목사의 젊은 시절 모습. ⓒ최재영

김형직과 숭실학교 동문이자 같이 활동했던 숭실대 초대 이사장 배빈수 목사의 젊은 시절 모습. ⓒ최재영

 

포평교회에 얽힌 김일성 주석의 기독교신앙

김일성 주석에게는 모친 강반석(康盤錫)의 오빠가 되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과 남동생이 되는 작은 외삼촌 강용석(康鎔錫)이 있다. 큰외삼촌 강진석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일제 치하 임강 지역에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하던 중 무장소조원들을 데리고 임강을 떠나 자성, 개천, 평양 일대에서 맹렬한 활동을 벌이다가 1921년 4월 평양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5년 장기형을 받고 13년 8개월 동안이나 옥중생활을 하였으며 이후 병 보석으로 풀려나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42년에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 강진석을 체포한 일본 밀정들과 사복경찰들이 이제는 부친 김형직 마저 체포하려 하자 이제 더 이상 임강에서도 살수가 없게 되자 몰래 이사 할 계획을 세웠다.

일이 다급해지자 김일성 주석의 일가족들은 또다시 이삿짐을 꾸려 임강을 떠났는데 가족들의 힘으로는 이삿짐을 도저히 운반할 수가 없게 되자 교회 방사현 전도사가 발구(달구지)를 끌고 무려 250여리나 되는 거리인 장백현 팔도구까지 동행해주며 이사를 도와주었는데 이때 방전도사와 김성주는 찬송가를 부르며 긴 여정을 왔다고 김일성 주석은 증언했다.

새로 이사한 김일성 주석의 집은 팔도강이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합수목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그의 부친은 이 집에 '광제의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의료사업을 벌였으며 이곳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일도 맡았다. 그 당시 김형직이 가장 많이 빈번하게 다닌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포평예배당이었으며 그가 팔도구에서 이사 온 다음 날 부터 그 예배당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뿐만이 아니라 군중을 교양하는 장소와 국내혁명가들의 집합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전해진다.

김형직은 예배가 있는 날에는 예배를 마치자마자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일선전(계몽교육)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풍금을 타면서 찬송가와 여러 가지 계몽 노래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또한 김형직은 예배가 없는 날에도 수시로 이 예배당에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 모임을 가졌으며 특히 이 1921년 10월 '조선국민회 포평지부'를 조직하고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비밀회합도 가졌다고 한다. 김형직은 손수 풍금을 타며 애국적인 노래도 보급하였을 뿐 아니라 러시아 사회주의 10월 혁명에 관한 정세 강연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김형직이 급한 사정이 있어 교회당을 못가는 날에는 모친 강반석이나 작은 아버지 김형권이 김형직을 대신해 예배 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일교양을 했다고 한다. 또한 김일성 주석은 동생 김철주와 함께 부친을 도와 자주 이 예배당을 출입하며 비밀연락원 역할은 했으며 때로 김성주(김일성 주석)는 동생 철주를 데리고 그 예배당에 수시로 찾아가 찬송가를 연주하기 위해 풍금 연주하는 법을 부친에게서 배웠다고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포평교회가 주는 의미

북의 모든 청소년들이 매년 2~3월이 되면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 답사 행군을 '포평혁명사적지'를 구심점으로 진행한다. 이때 반드시 그 포평예배당도 코스에 포함되어 직접 견학하며 해설사로부터 자신들과 같은 시절의 소년 김성주에 대한 설명을 자연스레 듣게 된다.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는 종교교육을 시킬 수 없는 북의 현실을 감안할 때 종교의 필요성을 느낄 겨를이 없는 청소년들은 해설사나 안내원의 설명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간접적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 항일투쟁의 한 방편으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소식을 접한다. 이 과정에서 포평 예배당을 통한 김일성 주석과 그 일가족들이 기독교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거나 확인한다.

해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북의 청소년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지금까지 40년 동안 이 포평교회당을 다녀간 학생들의 인원들은 수백만 명이 될 것이다. 그들은 과연 '교회' 가 각 시대마다 무엇을 하는 곳이며 더 나아가서 민족을 위한 '기독교의 존재 이유와 역할'까지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김일성 주석과 그의 가족들이 독실한 교회성원이며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의 이북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이미 그곳을 다녀갔던 수많은 이북 사회의 지도층들과 인민들에게 포평교회는 역사와 사회에 어떻게 대처하고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함께 포평교회에 얽혀있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은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서방교회들을 향해 커다란 의미를 시사해준다.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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