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왜 북한의 집권당은 '공산당'이 아닌, '노동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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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북한에는 조선노동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당 대회가 개최된다.

북한 사회주의헌법 제11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명시하여 조선노동당이 북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상하고 국가기관을 지도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1980년 제6차 대회에 이어 36년 만에 열리는 제7차 당 대회는 북한의 향후 방향에 대한 중요한 논의와 결정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NK투데이에서는 북한 제7차 당 대회를 맞이하여 조선노동당의 역사와 구조, 당 대회의 의미, 제7차 대회의 전망 등을 구체적으로 파헤쳐보고자 한다.

그리고 '시리즈 ⑷ 조선노동당, 이것이 궁금하다!' 에서 조선노동당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려 한다.

북한의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NKtoday21@gmail.com 로 보내주시길 부탁드린다.

<조선노동당 집중 분석>

⑴ 조선노동당의 창건과정과 그 의미
    ① ㅌ.ㄷ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당까지 http://nktoday.kr/?p=11311
    ② 조선신민당의 출현과 양당 합당
    ③ 합당의 배경과 의미
⑵ 조선노동당의 구조
⑶ 조선노동당의 역대 당대회
⑷ 조선노동당, 이것이 궁금하다!
⑸ 조선노동당 제7차 당대회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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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북한의 집권당은 '공산당'이 아닌 '노동당'일까?

⑴ 조선노동당의 창건과정과 그 의미
② 조선신민당의 출현과 양당 합당 

  

영화 '암살'에 등장했던 약산 김원봉 선생은 조선의용군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영화 '암살', KBS '궁금증클리닉' 캡처.

영화 '암살'에 등장했던 약산 김원봉 선생은 조선의용대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이 조선의용대의 3개지대 중 2개 지대는 중경 임시정부로 가 후에 광복군의 일원이 되고 1개 지대는 섬서성 연안으로 가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의 모태가 된다. 사진은 영화 '암살', KBS '궁금증클리닉' 캡처.

또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정당, 조선신민당

중국공산당의 중심지였던 중국 연안지역에 중국공산당 아래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1942년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이하 독립동맹)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조선의용군을 두었다.

조선의용군의 모습. ⓒ민족21

조선의용군의 모습. ⓒ민족21

비록 공산주의자들로 시작한 조직이었지만 이들은 독립동맹을 "어떠한 한 계급의 기초 우에 건립된 계급정당, 어떠한 일 계급의 이익만을 위하야 생긴 존재도 아닌" "조선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야(위하여) 조직된" "반일민족통일전선의 성질을 갖는 군중적 혁명단체"로 규정했다.

심양에 세워진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기념비. 팔로군 주덕 총사령의 제6호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진출해 심양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군인대회를 열고 중국내의 조선족을 보호하고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에 참여할 방침을 확정지었다. 군인대회의 포치에 따라 조선의용군 제1지대, 제3지대, 제5지대가 신속히 조직되였으며 제1지대가 2지대를 확건, 조직하고 3지대가 4지대를, 5지대가 6지대를 확건, 조직하기로 결정했기에 잠시 2지대, 4지대, 6지대를 설치하지 않았다.ⓒkrcnr.cn(중국조선어방송넷)

심양에 세워진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기념비. 팔로군 주덕 총사령의 제6호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진출해 심양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군인대회를 열고 중국내의 조선족을 보호하고 중국인민의 해방투쟁에 참여할 방침을 확정지었다. 군인대회의 포치에 따라 조선의용군 제1지대, 제3지대, 제5지대가 신속히 조직되였으며 제1지대가 2지대를 확건, 조직하고 3지대가 4지대를, 5지대가 6지대를 확건, 조직하기로 결정했기에 잠시 2지대, 4지대, 6지대를 설치하지 않았다.ⓒkrcnr.cn(중국조선어방송넷)

이들은 조선을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당면하여 조선독립의 해방을 위해 싸웠으며 조선혁명의 성격을 '자산계급(자본가계급)성 민족민주 혁명단계'로 규정하였다.

조선의용군 5지대에 편입되여 조양천에 도착한 태항산출신의 간부들ⓒkrcnr.cn(중국조선어방송넷)

조선의용군 5지대에 편입되여 조양천에 도착한 태항산출신의 간부들ⓒkrcnr.cn(중국조선어방송넷)

1945년 8월 9일 소련군과 88여단의 대일전 참전이 이루어지자 중국인민해방군 주덕 총사령은 화북의 태항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에게 만주와 조선해방을 위해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동하라고 제시하였다.

그러나 동북지방에 제때 도착하지 못한 조선의용군이 소련군과 88여단의 대일전에 참전하지는 못했다.

독립동맹이 조선의용군과 함께 만주의 심양에 도착한 것은 1945년 11월경이었으며 12월 광복 4개월 만에 한반도 이북지역으로 귀향하게 된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 주요 간부들. ⓒkrcnr.cn(중국조선어방송넷)

조선의용군 제3지대 주요 간부들. ⓒkrcnr.cn(중국조선어방송넷)

귀향한 조국 땅에는 독립동맹 성원들을 담을만한 기존의 정치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반일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독립동맹이었지만 단체 성격이 "진보적 군중적 정치단체"이었기 때문에 당장 모든 성원을 조선공산당으로 포괄하기 어려웠다.

또한, 독립동맹은 외국군들이 한반도에 진주한 현 상황이 '진정한 독립'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해방정국에서 독립동맹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무정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포함한 독립동맹의 일부 인사들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에 입당하기도 했다.

심양에 모인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주요 지도자들(앞줄 오른쪽 두번째 무정 총사령관이다) ⓒkrcnr.cn(중국조선어방송넷)

심양에 모인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주요 지도자들(앞줄 오른쪽 두번째 무정 총사령관이다) ⓒkrcnr.cn(중국조선어방송넷)

독립동맹은 '조선의 완전 독립'을 기치로 행보에 나섰다.

첫 번째로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비롯하여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북부조선총국, 평남농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여성총동맹 등과 함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독립동맹의 김두봉 주석은 평양방송을 통해서 '시국에 대한 태도표명'이라는 제목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며 자주독립을 위해서 매진하겠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에서 김두봉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중 제3조를 주권이 아국(我國)에 있는 '후견'을 5년간 실시한다는 뜻이지 '주권을 타국에 이양하는' '신탁'의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5년간의 후견 없이' 즉시 독립되었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3국 외상의 조선에 관한 결정이 그만큼 된 것도 조선의 국가독립완성에 '호의적 정의적 결정'이라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 결정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두 번째로 독립동맹은 1월 31일 항일시기에 만들어졌던 강령을 해방과 미소 양국 군대의 주둔이라는 변화한 현실에 맞게 고쳤다.

고쳐진 임시강령에서 독립동맹은 동맹의 기본목적을 조선독립의 완전한 쟁취로 놓고 새로운 국가로서 민주공화제에 입각한 조선민주공화국의 건립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경제면에서는 일제 및 친일파에게서 몰수한 대기업의 국유화와 경자유전(농사를 짓는 농민이 땅을 가진다)의 원칙에 따른 토지의 재분배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정책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독립동맹은 1월 25일 한 빈 부주석을 서울에 파견하여 한반도 이남에서의 조직건설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2월 5일에는 백남운 위원장을 대표로 하는 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북에서 2월 8일에 결성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임시정부)에 김두봉 부위원장과 최창익 총무부장이 독립동맹 파견된 성원으로서 참여하게 된다.

독립동맹은 향후 정당체계로 개편된다.

1946년 2월 16일 독립동맹은 조선신민당으로의 개칭을 결정하면서 조선신민당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독립동맹은 "급전직하로 변화되어가는 국내외 정세에 조응하여" "강유력한 조직체로 건국대업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조선신민당으로 개칭한다고 밝혔다.

독립동맹은 선언에서 독립동맹의 투쟁전통을 계속 발휘할 것을 맹세하였다.

독립동맹은 현 단계의 조선혁명을 '자산계급(자본가 계급)성 민주주의 혁명'으로 보면서 이를 위해서 독립동맹 임시강령과 대동소이한 혁명과제를 제시하였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의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북조선노동당으로의 '합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독립동맹이 정당체계로 개편한 이유는 해방정국에서 자기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공산당으로의 편입보다는 독립적인 당 결성을 추진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당시 북한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광범한 중간층과 지식인들이 공산당에 포섭되기를 주저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독립동맹의 당으로의 전환을 자극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신민당은 당명 개칭 후 1946년 6월 평양의 당 중앙본부에서 제1차 북조선 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남한에 있는 당 경성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 당중앙위원회로 개편하기로 했다.

조선신민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추진한 토지개혁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지지하고 적극 동참하였다

당시 토지개혁은 5정보(1만5천평) 이상의 토지들을 무상으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조선신민당은 경자유전에 따른 토지재분배를 강령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 잔재 청산 및 불평등한 토지구조를 극복한다는 측면에서 적극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양당 합당으로 탄생한 북조선노동당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문제가 공개적으로 본격화 된 것은 1946년 7월부터였다.

공식적으로는 1946년 7월 23일 조선신민당 김두봉 대표가 북조선공산당 김일성 책임비서에게 "현계단의 조선신민당의 과업과 목적이 북조선공산당의 그 과업 목적들과 합치된다는 의미에서" 합당을 제의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가시화되었다.

이는 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의 결정이었다.

이 제의를 받은 북조선공산당은 7월 24일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를 개최하여 신민당의 제의를 토론한 끝에 이를 접수했으며 "북조선 노동자 농민 지식분자 및 기타 근로대중의 리익(이익)을 대표하는 두 당의 합동은 조선의 민주주의적 새로운 역량의 성장과 민주주의 조선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 근로대중으로 하여금 더 광범히 뭉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화답하였다.

그리고 4일 후인 1946년 7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은 양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확대연합회의를 개최하여 김일성 책임비서와 김두봉 대표의 보고를 듣고 "조선근로대중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을 '연합'하여 '북조선로동당'으로 칭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집권당은 소련공산당, 중국공산당, 베트남공산당 등 '공산당'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조선신민당과 합당하면서 명칭을 바꾸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북한의 집권당은 '노동당'이 되었다.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대표들이 양당 합당을 결정한 직후 양당은 각급 하부단위에서 통합작업을 개시하였다.

조선의용군, 독립동맹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허정숙 여사. 화북지역에서 조선인젊은이들을 묶어 조선독립동맹으로 이끄는 등 독립동맹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독립동맹의 집행위원을 했으며 합당된 북조선 노동당의 간부부장을 역임했다.   출처 : 위키백과.

조선의용군, 독립동맹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허정숙 여사. 화북지역에서 조선인젊은이들을 묶어 조선독립동맹으로 이끄는 등 독립동맹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독립동맹의 집행위원을 했으며 합당된 북조선 노동당의 간부부장을 역임했다. 출처 : 위키백과.

그리고 1달 후, 통합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양당은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평양에서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의 합당으로 1946년 8월 28일 북조선노동당이 건설되던 모습. 출처 : 위키백과.

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의 합당으로 1946년 8월 28일 북조선노동당이 건설되던 모습. 출처 : 위키백과.

대회는 북조선노동당 창립준비위원회를 대표한 김일성 책임비서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되었다.

대회에는 북한지역의 6개 도(함경남북도, 황해도, 평안남북도, 강원도)에서 뽑힌 801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전체대표 중 여성대표는 89명이었으며 사회성분별로는 노동자 183명(23%), 농민 157명(20%), 사무원 385명(48%), 기타 76명(9%)이었다.

노동자, 농민을 합친 비율이 사무원 비율에 미치지 못했다.

또한 대표들의 학력정도는 소학정도 228명(29%), 중학정도 359명(45%), 대학정도 214명(26%)이었으며 외국에서 혁명사업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이 427명(53%)으로 과반수에 달했다.

당시 대학졸업생의 비중을 볼 때 인텔리(지식인계층)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표들은 인텔리, 사무원들이 중심으로 되었던 조선신민당 세력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북조선노동당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이는 창립대회 전체대표 중 일제하 반일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사람이 373명 (46%)이었고 이들 중 263명이 옥중생활을 하였으며 이들이 받은 총 형량은 징역 1,087년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참고자료

 "<조선노동당 60년>①'건설'과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 연합뉴스, 2005.10.06

"북한의 10월은 '노동당의 달'…각종 黨 기념일 몰려", 연합뉴스, 2013.10.08

이종석,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북조선로동당으로의 '합동'에 관한 연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기광서, '북로당의 창설 : 한반도 공산주의 권력의 중심 탄생', 한국역사연구회

북한정보포탈 – '조선노동당', 통일부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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