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를 가다⑩ 평양 제1교회 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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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리즈는 총 20회에 걸쳐 북한의 '범 기독교 교회'들을 탐방한 '북한교회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남한이나 서구식 기독교가 아닌 '북한식 기독교'의 실상을 살펴보며 마치 초대교회 형태처럼 정착한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합니다. (최재영 목사 이메일: 9191jj@hanmail.net)

편집자 주: 통일뉴스 동시 게재

 

'평양 제1기도처소'를 방문하다

현재 평양에는 남측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통합측 교단(이하, 예장 통합)에서 수십억을 지원해 재건축한 봉수교회당 외에도 교회 언덕에 지은 460평 규모의 평양신학원도 있으며, 그 옆에는 480평되는 제1온실도 지었다. 예장 통합측은 이와는 별도로 동평양대극장 건너편 대동강 변에 400평 규모의 제2온실을 연이어 지었다.

마침 제2온실 옆에 200평 정도의 부지가 남게 되자 북측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하 조그련)에 교회당 건축을 요청했으나 반대해 무산되고 그 대신 조그련과 남측 예장 통합측은 제2온실을 관리할 수 있는 온실관리동을 짓기로 합의했다. 온실관리동 건물 1층에는 온실관리를 위한 관리동을 만들었고 2층에는 30여평 규모의 '평양 제1기도처소'가 여러 우여곡절 끝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나는 2014년 4월의 어느 봄날, 봉헌식 이후 지금까지 마치 금단의 구역처럼 출입이 통제된 '평양 제1기도처소'가 입주해 있는 200평 규모의 온실관리동을 방문해 둘러봤다. 북측 조그련과 안내부서는 이처럼 복잡한 사연을 지닌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동'에 위치한 이곳 예배당을 지금까지 일반인에게 공개한 적이 없었기에 조심스런 심정으로 이곳저곳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이곳 2층에 있는 예배당의 존재조차 모를 뿐더러 평양을 방문하는 외국인들과 해외 동포들도 잘 모른다. 또한 예장 통합 교단에 속한 일부 신자들 중에는 '기도처'인 줄도 모르고 아직도 '평양 제1교회당'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기도 하다. 또한 설립 이후 지금까지 '평양 제1교회'는 많은 오해와 왜곡된 소문들이 난무하고 있어 정확한 사실 파악이 필요했다.

'평양 제1교회'가 탄생하게 된 계기는 서평양 지역엔 봉수교회, 칠골교회 등이 있으나 동평양 지역엔 교회가 전무한 것을 파악한 예장 통합측에서 봉수교회 재건축 여세를 몰아 '평양 그리스도교사회봉사관'과 '평양 제1교회' 건축을 계획하면서 시작됐다. 북한교회재건 목표에 따라 우선적으로 동평양, 남포, 개성, 금강산(고성), 원산, 나진, 선봉, 신의주 등 11개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로 한 프로젝프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교회가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건축되는 과정이 아래와 같이 그리 순탄치 못하고 복잡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김일성 김정일화' 전시장 참관을 마친 관람객들이 제2온실 앞으로 빠져나오는 장면. ⓒ최재영

'김일성 김정일화' 전시장 참관을 마친 관람객들이 제2온실 앞으로 빠져나오는 장면. ⓒ최재영

400평 면적의 '제2온실(좌측)'과 200평 면적의 '온실관리동(우측)' 모습. 온실관리동 2층에 '평양제1기도처소(평양제1교회)가 있다. ⓒ최재영

400평 면적의 '제2온실(좌측)'과 200평 면적의 '온실관리동(우측)' 모습. 온실관리동 2층에 '평양제1기도처소(평양제1교회)가 있다. ⓒ최재영

 

'평양 제1교회'는 무기한 휴식 중

제2온실을 건축할 당시 남측의 예장 통합에서는 이곳에 '평양 제1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수백석 규모의 교회당을 건축하려 했으나 북측 조그련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 대신 온실관리동 건물 2층에 약 5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의 작은 예배당(기도처소)을 만들게 된 것이다. 예배당 안에는 회중석 장의자와 함께 피아노가 구비돼 있었고 크리스탈로 제작된 설교 강대상이 놓여 있었으며 강대상 뒤에는 일반 교회처럼 작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인테리어 구조는 흔하게 볼 수 있는 30평 남짓되는 개척교회 예배당과 크게 다를 바 없었으며 예배당 출입문 상단에는 '00교회' 대신 '평양 제1기도처소'라는 간판이 부착돼있었다. 예배당이 위치한 온실관리동(200평) 바로 옆에 있는 유리로 제작된 넓은 제2온실(400평) 안에는 각종 이름 모를 꽃들과 화분들이 즐비했고 화초 묘종들이 자라고 있고 반대쪽 출입문 위에는 '김일성화'와 '김정일화' 그림이 간판처럼 붙어 있었다.

그리고 제2온실 바로 앞에는 3층 규모로 지어진 엄청난 크기의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과 본관이 자리잡고 있어 입장객들과 관광객들로 매우 붐비고 있었는데 마침 해마다 2월과 4월이 되면 북의 두 지도자가 탄생한 계절이라서 어느 때보다도 내방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총부지 면적 3만㎡ 위에, 1만 1천 600㎡ 가 되는 엄청난 크기의 전시장 안에는 외국 관광객들과 북한 인민들이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물밀 듯 밀려들어 대혼잡을 빚을 정도였다.

아무튼 이곳 '평양 제1기도처소'는 완공이래 지금까지 주일 예배가 드려진 적이 거의 없으며 조그련 소속 목회자가 정식으로 파송돼 목회활동이 이뤄지는 곳도 아니었다. 더구나 건축과정에서 빚어진 남북간의 불신과 오해 때문에 북측 조그련은 이 예배당을 공개하기 매우 꺼려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동평양대극장의 공연을 관람할 때나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을 방문할 때를 활용해 잠시 틈을 내서 방문할 수 있었으며 남측에서 알고 있는 '평양 제1교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만 5.24조치가 해제되고 남북 교류가 다시 회복될 경우에는 정상적인 목회가 이뤄질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온실관리동 2층에 자리 잡은 '평양 제1기도처소' 모습. ⓒ최재영

온실관리동 2층에 자리 잡은 '평양 제1기도처소' 모습. ⓒ최재영

'평양 제1기도처소'가 입주해 있는 제2온실(좌)과 온실관리동(우)이 붙어 있는 모습. ⓒ최재영

'평양 제1기도처소'가 입주해 있는 제2온실(좌)과 온실관리동(우)이 붙어 있는 모습. ⓒ최재영

동평양대극장 모습. 바로 맞은편에 온실관리동과 '평양제1기도처소'가 있다. ⓒ최재영

동평양대극장 모습. 바로 맞은편에 온실관리동과 '평양제1기도처소'가 있다. ⓒ최재영

 

통합측 남선교회의 야심찬 계획

'평양 제1교회' 건축이 시작된 계기는 예장 통합측 교단 산하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이하 남북위)' 뿐 아니라 교단내 전국 조직인 '남선교회'에서 추진하는 '민족복음화'와 '북한교회재건' 정책 때문이었다. 남선교회는 한반도 통일에 대비해 이북지역에 11개 교회당을 건축한다는 야심찬 대북사역 계획을 세웠고 평양시를 포함한 이북 각 도에 1개 교회씩, 모두 11개 교회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교회당 하나 짓는데 필요한 건축비를 교회 한 곳당 1억원으로 정해 모두 11억원을 모금하기로 했다. 이때 모금한 금액 중에서 1억 5천만원을 평양신학원 건축에 지원했으며, 조그련을 통해 북한 신자들을 위해 성경과 찬송가 제작에 필요한 원자재 대금 1억 2천만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왕성한 대북사역을 하던 예장 통합측 남선교회는 함경북도, 함경남도, 양강도, 자강도 및 용천군,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북도, 황해남도, 강원도, 평양시 등 11개 지역을 대상으로 각 노회들이 연합해 한 개 교회씩 재정을 분담하기로 결의한 후 '11개 교회는 모두 벽돌로 짓되 300명이상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을 것이며, 1억원 규모를 적립하라'는 구체적인 지침까지 전국 남선교회에 내릴 정도로 구체화되었다.

이렇게 해서 11개 지역 중에 가장 먼저 동평양 지역에 지어지게 될 '평양 제1교회' 건축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북측 조그련과의 시국관과 목회적 가치관 차이와 이견 등으로 인해 시시각각 난관에 봉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북측은 원래부터 교회당 건축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대입장을 보였고 온실 건축에만 긍정적 입장이었으나 예장 통합측은 북측 조그련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았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대동강변 6백평 부지에 4백평 규모의 제2온실과 200평 규모의 온실관리동 그리고 약 30평 정도의 평양 제1기도처소를 완공했으며 당시 1차로 총 공사비가 2억 8천만원 정도가 지출됐다.

제2온실 입구 모습. 안에는 각종 화분과 다양한 화초 묘종들로 가득차 있다. ⓒ최재영

제2온실 입구 모습. 안에는 각종 화분과 다양한 화초 묘종들로 가득차 있다. ⓒ최재영

동평양대극장 쪽에서 바라본 제2온실 우측 측면 모습. ⓒ최재영

동평양대극장 쪽에서 바라본 제2온실 우측 측면 모습. ⓒ최재영

대동강 방향에서 바라본 제2온실 좌측 측면 모습. ⓒ최재영

대동강 방향에서 바라본 제2온실 좌측 측면 모습. ⓒ최재영

 

제 2온실 앞의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

온실관리동 2층에 입주해 있는 '평양 제1기도처소'는 건물 외부가 교회당 형태이거나 십자가 탑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서 외부에서는 존재 자체를 전혀 모른다. 더구나 교회 간판이나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북 인민이나 해외 동포들 어느 누구도 이곳에 작은 예배당(기도처소)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한다.

겉으로 볼 땐 그저 유리온실과 비닐하우스로 제작된 온실 건물로만 보일 뿐이다. 더구나 제2온실 입구에는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이 마주하고 있어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듯 한 생각마저 들었다. 2000년 1월에 착공해 2002년 4월에 개관한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과 본관은 '평양 제1기도처소'가 입주해 있는 온실관리동과 서로 이웃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김일성화'는 지난 1965년 4월 김일성 주석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당시 스카르노 대통령에게 받은 선물을 10년 만에 가져와 1977년 4월 김일성 주석의 65회 생일 때부터 '김일성화'로 공식 선포한 꽃이다. '김정일화'는 원산지가 남아메리카인 베고니아의 한 품종으로 일본 원예학자 가모 모도데루씨가 품종을 개량해 지난 1988년 2월 16일, 당시 김정일 비서의 46회 생일 때부터 공식적으로 소개된 꽃이다. 이처럼 이곳은 북의 두 지도자를 상징하는 꽃을 상설 전시하는 건물인데 바로 그 앞에 '평양 제1기도처소'가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역설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이 무렵에 '김일성 김정일화' 전시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방문객들이 많이 몰려드는지 뒤에서 떠밀리듯 구경을 했고, 발이 밟히거나 서로 몸이 부딪히기 일쑤였다. 1,2층이 관통된 거대한 중앙 홀에는 두 지도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고 분수대와 한반도 형상등이 형형색색의 꽃들로 장식되어 있고 수백종의 '김일성화, 김정일화'가 전시되어 있어 눈이 휘둥그레할 정도였다. 전시회장에는 공기정화기, 냉온풍기, 난방장치가 전산화 되어 있어 필요한 온도와 습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자동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수 십명의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전시회와 화초관리를 총괄하고 있었으며 마치 꽃 재배 종합 공급기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듯 보였다.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 모습. ⓒ최재영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 모습. ⓒ최재영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 내부 1층 정면 모습. ⓒ최재영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 내부 1층 정면 모습. ⓒ최재영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 중심부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필자. ⓒ최재영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장 중심부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필자. ⓒ최재영

1, 2층 전시실에는 화려하고 다양한 꽃들이 끝 없이 전시돼 있다. ⓒ최재영

1, 2층 전시실에는 화려하고 다양한 꽃들이 끝 없이 전시돼 있다. ⓒ최재영

 

'평양 제1교회당' 자리는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자리인가?

예장 통합측 총회장은 교회건축 계획을 발표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로 알려진 토마스 목사(Robert J. Thomas)가 순교한 터가 바로 이곳 '평양 제1교회당' 자리라는 주장을 펴며 언론과 교단소속 신자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홍보를 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내가 이곳을 방문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과연 이 자리가 통합측의 주장대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자리와 연관이 있느냐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교회는 2년 후(2016년)가 되면 소위 '토마스 목사 순교 150 주년'이 되는 해가 된다며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평소 토마스 목사를 다각도로 연구하고 검증한 결과, 철저한 검증과정 없이 받아들인 한국교회에 의해 미화된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구체적인 확인결과 '평양 제1교회'가 위치한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동'은 토마스 선교사와는 그 어떤 관련이 없는 장소로 확인됐다.

이곳이 토마스 목사와 관련이 있으려면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되어 조선 관민의 화공에 의해 격침된 대동강변 쑥섬 부근이어야 하든지, 아니면 토마스 목사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가나 그를 기념하는 '토마스 기념교회'가 있던 현재의 평양과학기술대학 캠퍼스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평양 제1기도처소'가 있는 곳에서 쑥섬과 평양과기대 캠퍼스는 거리상으로 많이 떨어져 있으니 직간접으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기념할 만한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것이다.

1927년 5월 7일, 토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창립된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 전도회'에서 기존의 '조왕리 교회'를 '토마스 기념교회'로 선정했고, 1933년에는 그의 묘소 가까운 곳에 토마스의 이름 영문 첫 글자를 따서 'T자형' 교회당을 신축했다. 원래 '조왕리 교회'는 1901년 3월 1일 '평안남도 대동군 남곶면 조왕리'에 세워졌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평양시 낙랑구역 두단동' 이며 그 부근에 세워진 평양과기대 신축 공사 현장에서 이 '토마스 기념교회' 터가 발견되기도 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순교자는 주기철목사이며 이와 동시에 조선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알려진 토마스 목사도 주기철 목사와 함께 절대부동의 순교자 반열에 올라 한국교회 신자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와 주기철 목사 두 사람의 순교사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오문환(吳文煥) 장로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두 순교자의 죽음에 대한 역사의 진실에 대한 아이러니를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의 평양노회 목사직을 박탈한 주도세력이 바로 주 목사와 같은 노회소속의 친일파 오문환 장로였다. 특히 오 장로는 친일 행각을 하기 오래 전부터 토마스 목사의 순교사화 전파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인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주기철 목사가 소속된 평양노회의 장로교 기관지 '기독교보(基督敎報)' 편집국장을 맡은 오문환은 1938년 5월 1일 평양노회 소속 주요 인물들과 '내선교역자간친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일본인 목사들과 친목을 도모하며 일제에 부역할 토대를 만들고 총회와 노회소속 목회자들을 친일 활동에 대거 끌어들여 신사참배를 정당화하며 주기철 목사를 압박하고 파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단체를 이용해 기독교 황민화를 추진했고,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조선 목회자들을 일본의 신사를 돌며 참배하도록 했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가장 먼저 전향한 오문환은 서북 지역의 목회자들과 일제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조선장로교신도애국기헌납기성회' 등 단체에서 활동하며 일제에 부역했다.

오문환은 1923년 최초의 토마스 선교사 전기 '도마스 牧師傳'을 집필했고 자신의 저술을 통해 토마스를 조선교회에 최초로 소개한 후 1926년 '토마스목사 순교기념사업 전도회'를 발족했으며, 훗날 자신의 친일행각을 합리화하기 위해 1966년 '토마스 순교 100주년'까지 기획해 무려 40여 년간 토마스 순교 담화를 생산해 개신교의 성인으로 부각시켰다.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에 대해서 적어도 1926년까지는 일반적이고 사실적인 기록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1926년 오문환의 주도로 거행된 '토마스 선교사 순교 60주년 기념식' 영향과 1927년 '토마스 선교사 순교기념회' 창립하고, 연이어 1935년 토마스호라는 이름을 붙인 배를 건조해 해상 전도에 사용하는 등 토마스에 대한 신화적 미담들이 이전보다 더 감동적으로 구체화되는 바람에 개신교내에서 역사적 사실로 굳혀져 현재까지 전승해 내려 온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민족사적 고찰

설령 이곳 '평양 제1기도처 예배당'이 입주한 온실관리동 건물 자리가 실제 토마스 선교사가 죽었던 장소라고 해도 나는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토마스의 죽음과 관련해 선교적 관점이나 교회사적, 목회적 관점에서만 앞 다투어 다뤘으나 가장 중요한 '민족사적 관점'은 소홀하게 다뤘기 때문에 순교지로 정의하기에는 아직 미완의 연구 과제가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지면상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이미 공개된 사료를 통해 토마스의 행적을 살펴보며 그의 죽음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1863년 6월 4일 영국 웨일즈 하노버 교회에서 약관 24세에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해외선교에 뜻을 품고 그해 8월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으로 파송됐으나 몇 달간의 여행 끝에 상해에 도착한 후 부인은 병사했다. 마침 언어에 소질이 있던 토마스는 중국어를 익힌 뒤 북경에 머물며 런던선교협회에서 일하던 중 재정문제로 사임하고 청나라 해상세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되는데 1865년 9월에는 세관을 사임하고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1차로 조선을 방문하게된다.

1865년 9월 13일 선원 50명과 함께 서해안에 도착한 그는 무려 두 달 반 동안 스코틀랜드 바이블 협회의 에이전트 자격으로 주로 성경을 판매했는데 당시 협회의 방침은 무료배포가 아니라 판매였다. 11월 3일에는 선원 50명이 9척의 배에 나눠 타고 화승총으로 무장한 채 연평도 마을을 공격해 주민들과 총격전을 벌였으며 500 야드 떨어진 곳까지 총을 쏘았고 통통배 한 척을 전리품으로 탈취했다. 1주일 후인 11월 11일 마침내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간 토마스는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예정에 없던 베트남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상해로 떠나는 바람에 무산됐다.

결국 토마스는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항해사 겸 통역으로 채용돼 1866년 8월 9일 조선을 향하는 셔먼호에 동승해 다시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당시 토마스 목사를 파송한 런던선교회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토마스를 무모하고 위험한 행동으로 보고, 자제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866년(병인년) 8월 말, 마침내 대포로 중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여름철 물이 불어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와 총을 쏘며 당시 조선 상선의 양식을 약탈하고 주민 7명을 살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모두 12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야만적 행위를 일삼았다. 처음에는 대동강에 진입해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쳐들어 올라왔다. 이때 셔먼호 선원들은 자신들의 공격적 행동을 제지하던 조선 관리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붙잡아 억류하기도 했다.

이에 평양성 내의 관민들이 크게 격분해 강변으로 몰려들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셔먼호 선원들은 계속 소총과 대포를 관민을 향해 쏘아댔고 마침내 대동강 쑥섬의 모래톱에 좌초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 백낙연 등과 상의해 상황을 진두지휘하며 포수와 사수들을 동원해 총과 활을 쏘며 맞섰다. 9월 3일 마침내 조선 관군 측에서 대동강 물에 볏짚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작은 배에 식용유를 풀고 불을 붙여 화공으로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으며 결국 배는 소실됐다.

이때 토마스 목사와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Preston)은 뱃전에서 뛰어내려 강변으로 나와 목숨을 구걸했으나 결박당한 채 셔먼호 선원들에 의해 죽은 피해자 가족들에 의해 타살당했으며, 이때 승무원 23명 가운데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영국에서 토마스 선교사를 지원했던 윌리엄슨 목사는 "대영제국 같은 나라들이 조선처럼 무지하고 폐쇄된 나라를 개방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요 특권이다"라고 말했는데 당시 셔먼호에서 취한 토마스의 행동을 보면 비록 통역관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의 행적은 윌리엄슨 목사의 인식과 동일했다. 토마스 목사가 최후를 맞이한 셔먼호 사건에 관한 기초자료는 조선측의 여러 공식 기록, 미국의 외교문서, 영국 선교회측의 문서, 오문환 장로 저서와 기독교계 문헌, 구전(口傳) 등 크게 모두 다섯가지 종류가 있는데 오늘은 조선측 기록 위주로 살펴보자 한다. 다양한 관점에서 기록한 조선측 사료들은 주로 현장 보고에 기초한 객관적 내용이라 전체적 관점에서 사실을 왜곡하기 힘들다고 여겨진다.

당시 조선측의 현장 보고에 따르면, '조선어를 잘 하는 서양 청년'이 그 배에서 조선 관리들을 상대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으며 '손에 든 조총을 자랑하는 '그 청년'은 조선 관리들을 상대로 전쟁 협박을 일삼기도 하고, 툭 하면 조선의 보물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표했다'고 기록됐다. 또한「고종실록」,「패강록」,「평양지」등 대부분의 조선 기록을 보면 토마스 선교사는 셔먼호와 조선측 사이에 통역관 역할을 했다고 기록됐으나「환재집」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거의 선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거나 조선인 관리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자하게 화를 냈으며 교활하고 거만하였다는 식의 부정적인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운하견문록」에 수록되어 있는「적호기」에는 토마스 목사가 "뱃머리에 나와 서서 중군이 잃어버린 인신(印信)을 창끝에 걸고 바치면서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는 기록이 있는데 '중군'이란 조선 관리 이현익의 직함이고 '인신'은 그의 신표였다. 셔먼호가 조선관리의 신표를 탈취한 사건으로 이현익은 해당 관청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통역을 담당한 토마스 목사가 조선 관리들에게 내민 것은 성경책이 아닌 창 끝에 매달린 인신이었고 그는 이 인신을 관리들에게 되돌려주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한 마디로 인신을 돌려줄 테니 자신의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목숨을 구걸한 그가 조선 관리들에게 건넨 것은 성경이 아니라 창 끝의 군인 신표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리기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의 친우이자 유명한 시인이었던 조면호의「서사잡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궁지에 몰린 토마스 목사가 배에서 뛰어내려 항복을 애걸했으나, 분노한 평양성 주민들이 그를 때리고 짓밟아 죽였다는 것이다. 「평양지」의 내용도 아래와 같이 유사한 기록을 했다.

"(토마스 목사가) 항복하고 중군의 인신을 바치면서 생환을 애걸하자, 겸중군 백낙연이 '잔당을 모두 불러내오면 잘 대접한 뒤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토마스가 양서(영어 편지)를 셔먼호에 전달했는데,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배에 있는 자들이 나오기는커녕 도리어 총포를 마구 쏘는 바람에, 셔먼호에 화공을 가하는 한편 토마스와 자오링펑을 묶어 군인들에게 넘겼다. 그때 백성들 중에서 셔먼호 일당에게 살상된 자의 가족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살육했다."

이처럼 셔먼호와 관련된 모든 자료의 공통적 내용은 셔먼호가 조선측의 퇴거 요구에도 불응하고 평양성을 향해 돌진해 왔다는 것과 셔먼호측에서 먼저 조선의 관군을 억류해 무력 충돌이 발생하게 된 부분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조선의 기록들에 의하면, 기존 한국교회에 알려진 토마스 신화는 많은 허구와 의혹을 보여주며 선교사의 자세와 가야 할 길, 선교사가 지녀야 할 선교지에서의 행동과 방법론 등에 많은 허점을 보여준다.

또한 기존 토마스 전기에는 그의 죽음 직전에 발생했던 사건들 즉 누가 그를 결박했고 누가 그를 참수했는지에 대한 살해 주체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사료와 근거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으며 참수형을 집행했다고 알려진 망나니 박춘권에 대한 객관적 자료 역시 신화적 구전외에는 아직 명확한 것이 전혀 없다.

또한 타살 직전 성서를 전달했는지에 대한 기록들도 그 근거가 희박하다. 오히려 몸이 결박당한 채 조선측 관리들에 목숨을 구걸했으나 분노한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은 여러 가지 존재하나 죽기 직전까지 성경책을 뿌리면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아울러 셔먼호 내에서의 토마스의 위치와 선원들이 취했던 안하무인의 공격적 행위 등을 살펴볼 때, 토마스의 죽음을 덮어놓고 순교로만 보는 관점은 무리가 있다.

복음 전도를 위한 방문보다는 비즈니스 상업 행위를 위한 방문 목적과 조선의 주권을 무시한 채 저지른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 때문에 무력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한 타살은 될지언정, 순교라 하기에는 비약이 심한 측면이 농후하다. 토마스의 행적을 연구하려면 그의 죽음에 포커스를 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당시 '영국의 제국주의와 선교정책' 혹은 '최초의 조선어 통역과 번역 방법에 관한 연구'라든지 기타 다양한 관점에서 토마스 목사에 대한 연구 타이틀이 요청된다.

개신교 최대 교단임을 자랑하는 예장 통합측이 평양 한복판에 교회당을 건축한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아직도 민족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객관적 인식보다는 종교적 사대주의와 비본질적 허상에 사로잡혀 토마스 선교사와 무조건 결부짓는 태도는 옳지 않으며 경쟁 교단과의 실적을 의식해 평양 한복판에 교회당을 건축하려는 욕심만 앞서 보였다.

예장 통합측 교단은 이 건물 터가 토마스 목사와 실제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자꾸 연관 짓기전에 과연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함께 토마스 목사의 죽음이 우리 민족사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선교 중심적으로만 과장되게 해석하기보다 민족 역사의 관점에서 냉철하게 바라보야 하며 당시 세계를 식민지화 하려던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양 식민지화의 시각에서도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순교로만 칭송하고 포장한다면 우리 민족의 자주와 주권에 대한 역사관과는 괴리된 해석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며 자주적 민족사관에 철저하게 무장된 북한과의 소통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추앙받는 영국출신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 의 모습. ⓒ최재영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추앙받는 영국출신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 의 모습. ⓒ최재영

1864년에 찍은 제네럴 셔먼호(General Sherman)의 모습. 이 배는 2년후 대동강 쑥 섬에서 격침된다. ⓒ최재영

1864년에 찍은 제네럴 셔먼호(General Sherman)의 모습. 이 배는 2년후 대동강 쑥 섬에서 격침된다. ⓒ최재영

토마스 선교사의 시신이 안장된 대동강가의 묘지를 훗날 촌로들이 방문한 장면. ⓒ최재영

토마스 선교사의 시신이 안장된 대동강가의 묘지를 훗날 촌로들이 방문한 장면. ⓒ최재영

당시 '토마스 기념교회'의 모습. '조왕리 교회'는 토마스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묘지 인근에 기념교회를 건축했다. ⓒ최재영

당시 '토마스 기념교회'의 모습. '조왕리 교회'는 토마스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묘지 인근에 기념교회를 건축했다. ⓒ최재영

 

최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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