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7 사회주의헌법절 – ① 북한 헌법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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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은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절’이다.

북한의 헌법은 1948년 9월 8일 제정, 공포되었다.

이후 2012년 4월까지 모두 11차례 개정이 이루어졌는데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절은 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기존의 헌법이 사회주의헌법으로 개정된 것을 기념해 만들어진 날이다.

사회주의헌법절을 맞아 북한 헌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최고인민회의 사진, 북한은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한다. 출처 :  인터넷

최고인민회의 사진, 북한은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한다. 출처 : 인터넷

북한 헌법이 만들어진 과정

북한에서 헌법제정논의가 공식적으로 본격화된 시점은 1947년 11월 18~19일 열렸던 북조선인민회의 제3차 회의이다.

원래 북한은 임시헌법에 대해 반대했다.

실제로 북한은 1947년 4월, 한국 측의 남조선과도입법회의가 임시헌법을 만들자 분단 고착화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0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식 결렬되고 미국의 주도로 1947년 9월 7일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는 등 분단문제가 대두되면서 북한도 임시헌법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었다.

북한은 헌법 제정 논의를 국제사회의 정세와 여론을 판단하여 추진했다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인민회의 김두봉 상임의장은 ‘북조선임시헌법준비에 관한 보고’에서 ▲해방이후 북조선에서 실시한 민주개혁을 법적으로 공고화할 필요 ▲전체 조선인민대중에게 쟁취해야할 헌법의 내용을 보여줘야할 요구 ▲국가조직을 촉진하여 자주독립을 수립하기 위해 ▲통일적 민주주의 공화국의 정치, 경제구조의 형식을 제정하기 위해 헌법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두봉 상임의장의 보고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은 헌법제정을 통일국가 수립을 염두에 둔 준비과정으로 생각했으며, 북한에서 진행된 토지개혁 등의 개혁조치를 확정하고 이를 알려내는 수단으로 삼았다.

제3차 북조선인민회의 결과 31인으로 구성된 임시헌법제정위원회가 만들어지고 1947년 12월 20~21일에 걸쳐 헌법초안이 만들어졌으며 3개 분과로 나누어 검토한 후 1948년 2월 7~8일 제4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회의에서는 헌법초안을 바로 채택하지 않고 ‘전 인민토의’ 절차를 밟을 것을 결의했는데, 이는 “전 조선의 인민들에게 헌법의 내용을 알리고 이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자기의사를 펼칠 기회를 준다는 민주적 절차의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 인민토의’는 1948년 2월 11일부터 4월 25일까지 2달여 동안 진행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북한지역뿐 아니라 남측의 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 사회단체들도 헌법토의에 함께 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한 토의가 끝난 후 4월 28~29일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헌법 ‘찬동’이 결정되었다.

헌법을 바로 채택하지 않고 ‘찬동’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자신들이 만든 헌법이 북한만의 단독정부의 것이 아니라 장차 성립될 통일정부에 제출하여 승인받아야 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 헌법의 변화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1948년 만든 헌법을 ‘인민민주주의헌법’이라고 부르는데 1972년 사회주의헌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다섯 차례의 부분개정이 있었다.

이 개정은 내각 구성원의 일부 조정, 최고인민회의 임기와 인구비례에 따른 대의원수 조정, 지방주권기관의 명칭변경과 선거연령 수정 정도로써 헌법 개정으로서의 큰 의미를 둘 만한 변화는 없었다고 한다.

헌법의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1972년 12월 27일 있었던 사회주의헌법제정이다.

사회주의헌법이 만들어진 배경은 1948년 헌법제정 이후 북한이 사회주의 정책을 점차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를 헌법적으로 확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토지와 기업과 같은 생산수단의 경우 농업 협동화와 사회주의 공업화 등을 거치면서 개인 소유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청산리방법, 대안의 사업체계, 천리마운동 등 사회주의식 경제관리 방법이나 군중운동이 전면화 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1972년 10월 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초안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사업의 성공적 완수와 도시와 농촌에서의 사회주의로의 개조를 통한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건설에서 성과를 달성”했으며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에서 이룩한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며,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이룩한 성과를 법적으로 고착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1972년 사회주의헌법에서는 주석제를 도입하였고 주체사상을 북한의 지도이념으로 명문화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김일성 주석에 의해 제시된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 천리마운동, 대안의 사업체계 등이 헌법조항에 들어갔으며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수정했다.

사회주의헌법 제정 이후에도 다섯 차례 헌법 개정이 있었다.

1992년 4월 헌법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을 거치며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변화된 국제환경을 고려해 개정되었다.

북한은 군사력을 더욱 강화해야 하는 상황에 따라 국방위원회를 신설하여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군사 관련 제반기능과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이관하고 국방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권이 무너짐에 따라 국가 지도이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주체사상의 독자성을 강조했으며 대외정책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강조하는 것에서 '자주성을 옹호하는 세계인민들과의 단결', '자주·평화·친선'으로 변경했다.

1998년 9월 헌법은 흔히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 출범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는데, 김일성 주석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먼저 헌법의 명칭을 김일성헌법으로 했으며 주석제를 폐지하고 김일성 주석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국방위원회의 권한을 더욱 강화해 국방위원장이 군대와 국정전반을 실질적으로 관장하고 대외적으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명목상 국가수반이 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특수 경제지대 설치, 지적재산권 조항 등 경제 분야 7개 조항을 신설함으로써 당시 겪고 있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2009년 헌법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 출범 이후 변화된 상황을 반영했다.

먼저 국가 지도이념에 주체사상과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창시한 선군사상이 들어갔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선군정치는 “인민군대 강화에 최대의 힘을 넣고 인민군대의 위력에 의거하여 혁명과 건설의 전반 사업을 힘있게 밀고 나가는 특유의 정치”로서 군대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부터 시작해 경제건설 등의 혁명사업을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지위를 별도로 다루면서 북한의 최고영도자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정식화 했다.

2012년 4월 헌법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를 반영해 개정이 이루어졌다.

먼저 헌법 전문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업적을 서술해 김일성-김정일 헌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했고 기존에 있었던 국방위원장 대신에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신설했다.

또한 헌법 전문에 ‘핵무기 보유국’임을 명시한 것도 큰 특징 중에 하나다.

참고자료

성균법학 제24권 ‘북한헌법 변화의 특징과 전망’ 김형성, 조재현
북한정보포털, 북한 헌법

 

이동훈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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